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시인,수필가
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시인,수필가

24절기의 하나인 경칩이 봄의 문턱을 넘어 산과 들의 만물을 깨우느라 야단이다. 그 소리 요란해서 어디 잠을 잘 수가 있느냐고 아우성인건 사람뿐이려나. 우수와 춘분 사이의 절기로 새싹이 돋는 것을 기념하고 본격적인 농사 준비를 하는 중요한 절기이다.

잠자던 개구리도 놀라서 튀어 나온다는 경칩에 아침부터 설레이거나 놀람은 커녕 무료함 덕분에 느긋하고 길게 엎드려 있으려니 슬슬 배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묵직하고 무언가 걸린 느낌이 있는가 하면 메스꺼운 징조가 내리앉을 정도로 기분이 썩 좋지 않다.

하는 수 없이 소화제 한 알을 입에 넣고 떱떠름하게 물을 마신다. ‘벌써 이렇게 맥이 풀려서 어쩐다?’ 속으로 꼬시래기 같은 생각이 훅 솟구친다.

그러면 메스꺼움도 해소 시킬 겸 보통리 호숫가를 몇 년 만에 걸어 보기로 했다. 핸폰을 갈아 작동법도 정확히 잘 모르는데 며칠 전 보아 두었던 앱을 얼른 찾아 열어 본다. 만보기다.

‘그럼 그렇지, 오늘부터 대차게 걷기운동부터 하고 차츰 요가, 수영도 해야겠지.’

그동안 얼마나 걷기를 안 했으면 몇 보 걷지 않았는데 체증이 스르르 갈아앉는다.

‘그럼 그렇지, 은근히 장수하신 부모님을 떠 올리며 부모님 살아생전 연세까지는 가야 하지 않겠어.’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보통리 데크길을 찾아 걸어간다.

호수는 그이처럼 담담하고 여유있는 모습으로 언제나처럼 잔 비늘을 털며 웃는 듯 소리 없는 메시지를 보낸다. 어느새 호숫가의 황새도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가는 다리를 뽐내며 다가오고 있다.

“마치 너 못 봤지? 이게 나야.”

하는 듯하다. 호숫가 외곽을 따라 펼쳐진 데크길은 고즈넉하다 못해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아마도 나무의 질감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편안하게 잡아 주는게 아닐까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상큼한 바람이 어느새 새싹에서 나는 향기 같은 걸 품고 있는 듯 성큼 코끝을 간지럽힌다. 정말 기분이 남다르다. 호수의 잔물결은 언제부터인지 잔잔한 흥분제를 먹은 것처럼 요요하게 흐르며 때로는 잠자던 감성을 묘하게 건드린다. 호숫가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은데 자칫 잘못하면 훼방을 놓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훅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중년의 남녀들도 손을 꼭 잡고 가거나 다정스레 어깨동무를 하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담소를 하면서 간다. 얼마 안 있다가 생각지도 않던 대형사고가 호수를 덮치는 일이 생겨났다. 하얀 승용차 한 대가 호수 속으로 곤두박질 친 것이었다. 영화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현장에서 이런 일을 겪는 것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 후의 일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처참했다. 119와 함께 경찰차가 와서 물 속에 빠진 승용차를 꺼냈는데 승용차 안의 사람은 이미 물속에서 죽었는지 기척이 없이 늘어져 있었다. 우왕좌왕 하다가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는 119 소방대원이 처치를 한 후에야 그 곳을 떠났다. 한참 데크길을 걸으며 이월의 호수를 보고 있노라니 종전의 혼돈과 놀라움은 어디 갔는지 고요와 적막이 흐르는데 호수 가장자리에 묘한 절경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연꽃이 지고 난 겨울의 뒷모습이라고나 할까. 마른 듯 하면서도 꼿꼿한 연줄기가 기하학적으로 구성이 되어 마치 조형물을 보는 듯 했다. 꺾이고 꺾여서 삼각형, 마름모형, 마치 물 속을 배경으로 작품을 연출하는 그 모습은 감동 그자체였다. 어느 연꽃대는 연밥이 그대로 남아 하나의 스탠드를 연상케 하는데 여기저기 전개된 모습이 가히 절경이었다. 주위에 스스럼없이 펼쳐지는 자연 풍경은 마치 자연만이 펼칠 수 있는 한 점의 수작이라고나 할까. 가다 서고 가다 서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현장의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지 못하는 것이 최고의 한이 될 정도로 안타까웠다. 그동안 무얼 했지? 자책감과 함께 부끄럼까지 몰려오기도 했다. 둘레길을 한참 걸으며 시골에 가 있는 그를 생각했다. 얼마 전 마을 사람에게 냉이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위를 올려 보지 말고 아래를 보면 된다고 했다며, 마치 우문에 현답을 받은 것인 양 좋아하며 시조 한 수 올려 준 것이 생생하다. 그가 끓인 된장찌개가 보통리까지 퍼져 나는 것 같아 혼자 빙긋이 웃는다. 이곳에도 냉이가 있을 텐데 하며 여기 저기 길가며 밭을 둘러 봐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보여도 냉이를 캐지는 않을 테지만 그 풍광은 그리고 싶어진다. 모처럼만의 걷기 운동은 몇 년 만인가. 감개가 무량해지며 헬스 정보를 보니 제법 몇 천보가 훌 쩍 넘는다. 우울 가까이 쳐졌던 마음을 치켜 올리고 정신마저 신선한 바람으로 경치로 깨끗이 씻어낸 기분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정말 가까이 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하는 하루였다. 어디선가 개구리도 깜짝 놀라 펄쩍 뛰어나와 봄마중을 하고 있겠지. 내일부터는 시간을 좀 더 짜서 보통리를 제대로 돌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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