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의 교육공무원생활을 하다가 퇴직했다. 그저 여유롭게 마음은 놀고 싶었다. 하지만, 한가하면 떠난 친구가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바쁜 일상이 내게는 최고의 약이라 생각된다. 다시 계약직으로 8년 째 출근한다. 아침에는 여행 가는 듯 분주히 일어나 버스를 탄다. 오가는 차들과 나날이 변하는 가로수와 도심의 풍경들을 구경한다. 퇴근 때는 관광을 다녀오는 기분으로 집으로 온다. 항상 이어폰을 끼고 강의를 듣고, 저녁 시간은 교재와 동영상을 들으며 공부한다.

오늘도 출근하여 꽃들의 전당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따르릉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택배전화다.

“서울 스튜디오 쉼표에서 보낸 착불 우편물인데, 집에 계시는 지요?”

“아닙니다. 직장이니 집 아래 슈퍼에 맡겨 주세요. 요금도 슈퍼에서 받아 가세요.

돈 드리라고 전화하겠습니다.”

오전 10시쯤 전화를 받고 온종일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예쁘게 잘 수정해 달라고 했는데, 어떻게 나왔을까?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래층 슈퍼에서 우편물을 찾아 개봉했다. 마음에 들었다 눈 밑에 주름도 이마의 주름도 구겨진 옷마저 다림질한 것처럼 보인다. 졸업 사진이 왔다. 사각모 쓰고 웃는 내 사진을 보니 나도 몰래 가슴이 먹먹하며 지난 세월이 흐린 날 냇가에 다슬기 기어 나오듯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산골 마을의 가난한 촌부의 육 남매 넷째 딸로 태어나 오빠 언니 동생들 틈에서 겨우 초등학교 졸업을 했다. 우리 반이 67명 졸업하여 3명이 중학교에 못 갔는데, 거기에 끼인 나였다. 또래 친구들은 하얀 카라에 폭넓은 치마를 입었다. 검정 교복을 입고, 학생 가방을 들고, 신작로 길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고 가는 것을 바라본다. 나는 논과 밭에서 부모님 일을 도우며 지나가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밭에서 일하다 가만히 밭골에 엎드리거나 밭 아래로 내려와 있다가 친구들이 지나간 뒤에 밭에서 일했다.

바라보기도 싫었다. 나 자신이 초라했다.

‘학교도 못 시킬 자식 왜 낳았냐고’ 모든 게 부정적인 생각으로 반항심만 생겼던 내 유년 시절이었다. ‘내가 커서 결혼을 하면 내 자식들은 무슨 일을 해서라도 대학까지는 꼭 시키겠다고.’ 23살에 언니의 중매로 비슷한 수준의 농촌 총각과 결혼했다.

그저 끼니나 굶지 않을 정도의 가난한 시댁에서 살다가 첫째를 임신 9개월 만에 이웃 동네로 논 700평에 두 칸짜리 초가집으로 분가했다. 병원에 가 출산을 하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결혼 전 약혼반지, (남편)에게 받은 금반지며 목걸이를 팔아 병원비를 냈다.

남편의 반지는 팔아서 생활비로 쓰면서 살았다.

시댁이던 친정에서 도움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면 우리도 자식들 낳아 대학까지 공부시킬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과의 전쟁이었다.

하루하루의 일상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봄이면 씨앗을 심으며 가을을 생각하고 여름의 출렁이는 들판을 보고 있으면 밝은 희망의 숲이 그려졌다.

분주하게 봄, 여름을 보내면 가을엔 곳간 가득 알곡이 쌓이고, 겨울엔 따스한 아랫목 이웃들과 정담을 나누며 살아온 젊은 날의 우리 부부의 소박한 삶이었다.

계절의 굴레 속에 나날이 논밭이 불어나듯, 자식들도 곡식이 무럭무럭 자라듯 잘 자랐다. 결혼해서 13년간 농사를 지으며 해마다 논밭이 불어나고 생활이 여유로웠다.

우리 부부는 결심했다. 산골에서 살면 자식들 상급학교 시키기는 힘들겠다고, 조카의 도움으로 수원으로 지하 방 두 개 달린 떡 방앗간을 전세 얻어 이사를 했다. 가방끈은 짧아도 나는 눈으로 보고하는 것은 몇 번 보면 그대로 할 수 있는 손재주는 있었다. 농사를 지을 때처럼 부지런히 현실에 충실했다. 손님은 왕이라 생각했다. 가게 쉬는 날이면 시장 떡집을 돌며 사 먹어도 보았다. 가만히 하는 모습을 눈여겨본다. 가게 시작하고 한 6개월은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떡 솜씨도 나날이 발전했다.

시골에서 해마다 논밭이 불어나듯, 해가 갈수록 차츰차츰 단골손님들도 늘어나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식들 상급학교 시킬 수 있는 생각에 언제나 마음은 푸른 하늘을 나는 새 같은 기분이다.

방앗간이 좀 한가할 땐 남편은 시골로 다니며 잡곡이며 마늘 고추를 사 와서 팔기도 하였다. 농사일할 때면 농사를 잘 지어도 가격이 하락하면 품값도 안 나왔지만, 도시에서 삶은 노력한 만큼 대가가 주어졌다.

떡 방앗간 10년 만에 2층짜리 상가주택을 사서 아래층은 가게를 하고 위층은 살림집으로 쓰기로 했다.

지하 방 두 칸짜리에서 시작하여 자식들도 방을 따로 쓸 수 있다. 천국 같은 기분이었다.

떡 가게 한 지 23년이 되니 4남매의 자식들은 대학 졸업하여 짝을 찾아 다들 떠나갔다.

이젠 우리 부부만의 여유로운 노후만 설계하면 된다. 했더니 내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정신없이 살아온 세월 속에 건강을 소홀한 탓인지 친구인(남편)이 간암 선고를 받았다.

수술받고 쉬면서 부랴부랴 떡 방앗간을 정리하고, 수원 시청 옆에 상가주택을 사서 이사를 했다.

이사해서 3년 6개월을 병원 치료받다가 친구(남편)는 내 곁을 떠나갔다.

떠나기 하루 전날 함께 살면서 ‘지금껏 고생했다며’, 이제는 하고픈 공부도 하고, 오래오래 잘 살다 오라고, 나도 70까지만 살다 갔으면 원이 없겠는데, 내 삶까지 이어서... 나 죽어도 당신 잘되게 해 줄게, 한다, 몸이 아프니 그저 넋두리처럼 하는가 했는데, 그 말이 나랑 나눈 마지막 말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큰 욕심 없이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바라며 가정에 충실하며 살아왔는데, 내게도 이런 시련이... 떠나고 나니 건강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후회가 발등을 쳤다. 허전한 빈자리를 책가방으로 채우고, 내 가게만 하고 다른 사람 일을 시켜만 보았는데, 나도 직장생활도 해 보고 싶어 직장도 다닌다. 61살에 중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 만에 졸업하고 수원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를 입학해 졸업하고, 경기 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 졸업을 한다. 방긋이 웃고 있는 졸업 사진을 바라보니 꿈만 같다.

나이 70에 대학을 나와도 자기만족이지, 어디 취직할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사각모 쓴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맛보며 지나온 나의 삶, 고생이 아니고 늘 봄이라 여긴다.

‘여보 나 사각모 썼어요’, 마음속으로 크게 외친다.

지나온 추억들이 영화 필름처럼 돌아간다. 나 혼자만 즐기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이슬비는 항상 나의 친구다.

오늘의 이 기쁨은 모두가 친구 응원 덕이다.

할미꽃으로 곱게 피어 제2의 남은 인생 소중한 시간 열심히 살아요.

박수 소리가 귓전을 울리며 친구의 얼굴이 시야를 스친다.


약력 

2017년 한국 시민문학 수필 등단

2022년 한국문학예술 시조 등단

수상 : 『새농민』수필 공모 대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인협회 회원

계간문인협회 이사

 

 


이서등 캘리화가
이서등 캘리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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