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바람은 밤새워 놀다 간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두었다.

갈색으로 퇴색된 감잎은 파스스한 얼굴로 유년의 여린 기억을 새롭게 되짚으며 어디 보란 듯이 종횡무진했다. 어찌 보면 조롱거리를 수집하듯 빈정상하기 딱 좋은 몸짓이었다. 삶이 망가지는 과정을 마당에서 체득하다니 고개를 돌리려다 그것 가지곤 안 되겠다 싶어 아예 기억의 잔뿌리라도 도려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누군가처럼 독한 것이 독한게 아니라 피하고 싶은 강한 부정의 표현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추스르며 마음을 깨물었다.

하지만, 딱히 그렇게만 단정지어 버릴 수도 없는 것이 이미 말라버린 몸에는 상흔들이 무수히 생겨나 있었다. 부서지고 긁혀지고 달아 없어질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으니, 만지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만 같은 조급한 상태여서 측은한 감이 배가 되었다. 아아, 그 감잎들.

그런 조락에 대한 상념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열한 번째의 달을 넘기고 있다.

바로 몇 달 전쯤만 해도 연한 어린 감잎들이 태어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환희에 벅차서 들떠 있었는지 간사한 시간은 마음까지도 먹먹하게 했다. 햇볕 환한 봄날, 감나무 잎은 먹기 좋은 홍시와 색깔 좋은 몸매를 생각하며 열심히 시간 들을 분주하게 만들었었지, 아마

담장 너머 그 까페를 종종 찾아갔던 이유 중 하나는 어린 감잎이 햇살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에 빠져 다음과 그다음의 시간을 미리 기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던 차에, 햇살 물든 몇 날이 지나면서 절기는 서서히 바뀌는데 어느새 비바람이 불었다. 볼우물 곱게 지으며 하얀 설레임으로 피어나던 감꽃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담장 아래 흩어진 감꽃들은 차라리 모습조차 귀여운 아기들을 연상시켰다. 순간 너무 예뻐서 하염없이 감꽃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며 얼마 동안 무상에 젖기도 했다.

그런 날 밤에는 어김없이 꿈속에서 별들이 내려와 감나무 잎에서 조롱조롱 매달려 유희를 하는 모습에 취해 있는 유년의 내가 보였다. 어느 때는 정신없이 감나무를 기어오르려고 발버둥 치면서. 끝없이 오르는 꿈은 감나무 끝에 닿으면 맑은 하늘과 내려놓을 것 하나 없는 가지끝에서 그네 타듯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넘나들며 재밌게 놀기도 했다.

꿈은 그렇게 사소한 곳으로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열매를 여물어 갈 것임을 예견해 주었다.

어떤 기대든 기대가 부풀면 현실이 된다고 믿고 싶었다. 기도도 했다. 그즈음 감나무에선 아주 기쁜 희소식을 들려준다며 감꽃마다 작디작은 잉태를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신비로웠다.

여러 날 비가 오고 비껴가던 햇볕이 서서히 곧게 세워지며 따사로움은 생명을 긴장시켰다.

감꽃이 떨어지던 날 그 꽃받침에서 조그맣고 작은 감꽃의 아기들이 탄생 되는 눈부시고 강열한 자연의 섭리를 보았다.

옆집 까페 주인은 골동품 수집가로 그의 골동품 전시장에는 그윽한 고려청자와 고급의 고문서가 전시되고 있다. 그는 아침마다 마당의 꽃을 돌보고, 나무 전지를 하거나 탁자 정리를 하며 소일을 했다. 가끔 담장 너머로 눈인사를 하기도 하고 까페에 가면 커피와 와플을 무료로 주기도 했다. 그가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집안 정리를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다. 마치 ‘골동품도 매일매일 이렇게 정성으로 다루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런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아기 감들이 감나무 가지에 조롱조롱 매달려 감잎 뒤로 숨거나 햇볕과 장난질을 칠 무렵, 비에 떨어진 감꽃들과 감 열매를 쓸어야겠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옆집에 감나무 가지가 넘어가게 한 것이 마치 자기들의 잘못인 양.

“그냥 두세요. 별들이 내려와 놀고 있는 것 같은걸요.”

내가 무심코 한 한마디 말에 그의 눈은 빛이 났다. 며칠 전 옆집 아주머니와 쓰레기 문제로 실갱이를 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눈빛이었다. 그 이후로 옆집 까페 주인과는 막역한 사이가 되면서 감나무의 감들은 토실토실 익어갔고 어느새 짙게 드리운 가을의 후광은 결실의 산물인 주황 감들을 풍경화처럼 보여 주었다. 얼마쯤 시간은 흘러 감나무를 보니 누구의 손길인지 그 좋았던 풍광은 사라지고, 한 잎 두 잎 감나무 잎들은 떨어져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모습 조차 아름답고 성스러워 보이더니 잔부스러기가 생겨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 흔적들을 무심히 바라보기를 며칠, 사무실 안에 누군가의 시화가 맑게 웃으며 걸려져 있었다.

마당에 굴러 다니던 감나무 잎이 깨끗하게 쓸려 나간 날, 바로 그 날에.

날, 머릿 속에는 고마운 사람과 시화 주인의 이름자를 떠 올리며 감나무에게 고별의 시를 쓰고 있는 투영된 내가 자꾸만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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