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달빛이 사르르 내려앉는 어느 가을 날, 아무도 남지 않은 행궁 안으로 들어가 본 적 있는가.

한옥의 풍광과 곁들여진 고운 등불이 한옥의 추녀자락을 밟고 다소곳이 불 밝히는 따스한 분위기의 그 곳, 어느 누구와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기분은 또한 무엇일까.

이날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의 날이었다.

수원의 일기예보에 대해서 그리도 민감해 본 적이 없는 내게 얼마 전부터 정확한 일기예보를 찾게 되었다. 인터넷으로 하루하루를 체크할 수 밖에 없었던 긴박감, 그리고 걱정거리. 그런 날들은 하루하루를 심장 뛰게 하는 결과를 낳았었다.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전시되었던 작가들의 시화작품이 젖어서 망가질지도 모르니까. 물론 방수는 잘 되었다고 하지만 만에 하나 시화들이 젖게 되면 낭패를 몰고 오기 때문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날도 역시 70%의 비가 온다는 예보에 아침부터 걱정이 태산이 되었다. 언제 어느 시점에서 비닐을 씌워야 하는 걸까. 시간을 보고 또 보고. 하늘을 몇 번 씩 올려다 보면서 ‘ 아, 어쩌지. 언제 해야 할까’ 평생 그렇게 심한 걱정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내게 닥친 필요불가결한 과제, 날씨와의 싸움이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시월의 가을하늘을 세모시 옥색치마로 풀이했고, 파란 가을하늘을 한 폭의 아름다운 천으로 비유하여 옷을 만들어 입고 싶다고 할 정도로 맑고 푸르름을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세월이 갈수록 가을비도 심심찮게 오고 예고 없이 천둥 번개가 치는 기이한 날씨로 변해 가고 있었다. 혹자는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을 높이고 사람들이 오염된 대지가 몸부림을 치는 거라며 대기의 변화를 걱정하곤 했다. 여기저기에서 산사태와 홍수, 지진까지 지구촌을 흉흉하게 하는데 사실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먼발치로 보는 일처럼 느껴져 정도의 차이가 있는 얕은 걱정과 무관심으로 일관한 적이 많았다. 현실은 만만하지 않고 이론으로만 대비책을 강구하거나 전문지식을 쌓았지 실상 대기의 변화를 실감하게 될 줄이야.

시시때때로 요동치는 가을하늘의 구름은 정말로 변화무쌍했다. 하늘을 보니 두꺼운 구름층이 무섭게 짓누르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하늘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기세였다.

비가 오기 바로 직전 비닐을 씌워야 하는 일은 분초를 다투는 일이 되었다. 미리 씌우자니 볼성 사납고, 너무 늦게 가면 미리 비를 맞아 축축해져 있을 테고 진퇴양난이었다.

청사초롱이 켜진 봉수당 뒤뜰은 전과 다름없이 고즈넉했고 행궁을 찾은 관광객들은 늘어선 시화를 보면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가며 문필가로 이름난 옛 정조대왕의 모습을 그리며 감상을 하는 모습이었다. 마감 시간이 넘어도 시화에 심취하여 감상하는 관람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고 기다리던 중 어느 정도 관객이 줄어 들자 서둘러 비닐을 씌우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던 빗줄기가 제법 굵어질 때 쯤 시화를 덮는 일이 마무리 되어 겨우 한 숨을 돌리게 되었다.

뒷날은 그대로 맑은 날이 되었지만 일기예보는 그 날도 비소식이 있었다. 비닐을 풀어내지 않도록 작정했는데, 안내를 맡은 한 회원이 보기가 불편했는지 비닐을 다 벗겨 버린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시화전을 하기에 그 쪽으로 옮겨 갔던 우리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다행히 그 분이 다시 비닐을 씌운 바람에 첫 번째 위기는 넘겼다.

그리고 다음 날 재단에서 연락이 오고 회원들에게서 전화가 빗발쳤다. 비가 오면서 바람도 함께 부는 바람에 덮은 비닐이 팔달산 쪽으로 날아가고 쓰러진 시화도 있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몇몇 회원들에게 비닐을 다시 덮어 달라고 간청했다. 의뢰를 받은 회원들이 비닐을 다시 씌우고 정리를 하는 중 거짓말처럼 하늘은 개고 파란하늘이 눈부신 햇빛과 함께 얼굴을 드러냈다. 비닐을 씌웠던 것을 다시 거두었으니 얼마나 번잡하고 분주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비소식, 이제는 차분히 저녁을 택해 비닐을 씌우러 행궁으로 갔으나 야간 개장날이 아니라 문이 닫혀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문화광광과에 연락이 닿아 행궁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오랜 역사와 전통의 장소인지라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비가 오지 않은 밤하늘을 볼수 있었다. 달빛 사이로 흐르는 구름과 살폿한 바람과 그윽한 달빛이 예사롭지 않은 어울림으로 다가왔다.

이 모습을 누가 보아야 할텐데 혼자서 보기에는 너무 아름다워 아쉬움이 컸다. 우리가 선택한 시화전, 주제도 잘 어울리는 추풍미담 속에는 분명 세월의 향기가 담겨져 있었다. 정조 그 분은 가고 없어도 분명 그 분의 넋 보이지 않는 지킴이가 되어 수원을 잘 이끌어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느새 내 마음속에는 한수 한수의 시가 나비처럼 살아서 행궁 안을 훨훨 날아오르는 모습 그려지고 있었다. 생명의 시, 생명의 빛, 생명의 마음들 꿈틀거리며 세차게 비상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곳에서 시화전을 한 것도, 문인들의 마음을 곳으로 모여들게 한 것도 아주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이 밤, 아무도 없는 한적한 행궁안을 걸어 나오며 정말 것이 바로 행운이 아니고 무엇인가. 저절로 마음 숙연해지고 행복의 물결로 깊어지는 감동이 너무나 생생하게 솟구쳐 오르는 것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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