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가끔 일을 몰두해서 하다 보면 훌쩍 시간이 흐른 걸 피부로 느낀다.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지 못한 자신이 약간은 섬뜩하고 겸연쩍어 서둘러 마음을 추스르며 시간을 확인한다.

정말 늦은 시간이다. 그 전 같으면 일분일초의 시간도 아까워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겠지만 이제는 느린 정신 탓인지 다 마무리하고 점검을 하기에는 과부하가 걸린다.

서글픈 일이라고나 할까. 칠분의 육까지 쓸 대로 다 써버린 지금 집중보다는 느림의 미덕을 지향하고픈 마음이 절실하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해야 할 일에 빠져 허덕인다.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순간, 시집을 펼치다 칼라사진 한 장이 눈에 걸린다. 문득 마음에 걸려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어쩜 내가 아는 김 선생님이다. 가끔 언니라고 부르는 그 분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수년째다. 시집 속의 그녀는 소녀처럼 밝은 표정으로 열대과일 아래서 함박 같은 미소로 웃고 있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시집 주인공은 인생은 하룻밤 일장춘몽이라며 한 편의 시에 그리움을 쏟아내고 있다.

어둠에 젖은 노을 길/ 당신과 내가 걷고 있는 길/ 별빛이 총총 흐르는 이국의 하늘아래서/ 단 하룻밤 비워 둔 당신의 자리에/ 처연한 달빛이 내려옵니다/

별빛이 달빛이 사위고/ 당신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빈자리를 살포시 더듬어 봅니다/

새벽닭 울음이 그치고/ 그 자리에 당신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항혼 깃든 눈주름을 타고/ 지난날 아련함이 흐르는 것은 왜입니까/

이제 그녀는 가고 없는데 노시인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시를 쓴다. 한때는 아내로 충직했던 그녀는 다재다능했다. 우리가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하면 달빛 푸른 밤에 그녀는 어김없이 멋드러진 창을 하곤 했다. 때로는 바닷가에서 때로는 들길에서 그녀의 구슬픈 창은 우리의 마음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가 남편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애증 섞인 스토리로 우리의 가슴을 적셔 주었다. 한때는 잊고 지냈던 그녀가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은 노시인과 함께 문단생활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세상을 하직하기 몇 년 전 그녀는 남편의 시집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수려한 문체와 귀품있는 그의 시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내게 하였다.

어느날인가 집 앞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는 그녀의 남편이 쓴 재능기부 시를 읽으며 왠지 정겹게 생각나는 그녀가 가깝고 달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노시인과 네명의 딸을 가졌고 저마다 재능을 살려 사회에 쓰임이 되는 일을 하였다. 밤을 새워가며 그녀는 승진시험에 몰두했고 만점을 받았다고 좋아했다.

말년에 그녀는 지팡이로 몸을 의지해 여행을 다녔다. 마지막으로 모임에서 땅끝 마을을 갔을 때 그녀는 우리와 함께 섬길을 걷지 못했다. 바닷가 까페에서 그녀는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무척이나 움직임이 힘들어 보였다. 점차 스러지는 한 줌의 혼으로 날아가는 과정이었다.

얼마쯤 그녀가 세상을 하직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무척 안타까워하며 그녀의 빈소에 들려 조문을 했다. 조촐하지만 다른 상가와 달리 입구부터 그녀의 딸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편지와 시, 사진들이 전시장처럼 붙어 있었다. 그중에 노시인의 시도 걸려 있었다. 시구마다 애정이 담뿍 담긴 표현은 더욱 슬픔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생전의 그녀는 우릴 좋아했고 어느 날인가에는 밤을 새워가며 지난날을 이야기 해 주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길에서 그녀는 얼마나 힘들고 허전했을까. 자식과 남편을 뒤에 두고 먼저 간 그녀가 한없이 안 됐어 보였다. 그날도 그녀는 시집 속에서 웃고 있듯이 밝고 환하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양 영정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발길을 돌리지 못하도록 그녀의 웃음이 우리를 하염없이 붙잡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남편이 똑같이 지팡이를 짚고 우리 곁에 있다. 몇십 미터도 걷지 못하는 그 분을 바라보며 자꾸만 그리워지는 그녀가 생각난다. 너무도 생생하게. 늦은 밤 그녀 생각이 오늘따라 부쩍 나는 지금이 순간 그녀를 위해 마음의 기도문을 왼다. 그리고 인사말을 드린다.

- 선생님 잘 계시지요? 당신은 오늘도 그곳에서 행복하게 웃고 계실 줄 압니다. 이렇게 시집에서 당신의 모습을 뵈오니 그나마 그리움이 멈추는듯 합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평안과 행복을 만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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