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정명희 수원문인협회장

가을이라 소슬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어온다. 어제저녁 늦은 시간에 선풍기를 켜 놓고 잔 덕분에 아침엔 온도가 내려간 기운과 합쳐 추워서 이불을 끌어 당겼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 싸한 분위기가 아침을 덮는다.

그는 그렇게 바람이라 칭하면서 이른 새벽에 몇 개의 짐을 챙겨 나가 버렸다.

“차 속에서 꺼낼 것 없지?” 그게 다였다. 아침이면 몸이 무거운 나는 잘가라는 인사도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끔 나는 그의 생각 언저리를 훑고 있다.

사실 그렇게 살아가는 그가 안쓰럽다고 생각하는 날들이 부쩍 많아진 요즘 느닷없이 충주에 땅을 샀다고 해서 또 속이 상했다. ‘나이가 몇인데 이제야 땅을 사다니 말도 안 돼’ 속으로 생각하면서 눈물이 글썽했다. 오죽했으면 집에서 먼 그곳에 땅을 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또렷한 답이 안 나오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그 나름대로 무던히 생각한 게 있을 것이라는 추측뿐이었다. 과묵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갑자기 용단을 내린 것은 그전부터 꿍꿍이 생각을 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얼마 전 그가 밖에 나갔을 적 집안정리를 하다가 땅문서를 보았다. ‘이게 뭐지? 뭘하려고? 별별 생각이 다 들긴 했다.’ 그런 그의 행동은 속수무책이었다. 스스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문득 그의 지난날을 거슬러 올라 가 보았다. 삼년마다 그는 취미생활을 바꿔가며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젊은 날 첫 번째 삼년은 테니스 치기에 몰두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모습으로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삼 년여 쯤 됐을 때 그는 배낭을 주섬주섬 싸더니 수석을 찾으러 간다고 하며 일요일마다 수석이 유명한 지방으로 나들이를 가 버렸다. 그다음 삼 년은 분재에 흥미를 가지고 여기저기 산으로 돌아 다녔다. 집에는 수석과 이름 모를 분재들이 쌓여갔다. 그러다 덜컥 허리를 다치게 되었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실 앞으로 살 걱정이 될 정도로 그의 허리는 심하게 추간판탈출증으로 맥을 못 추었다. 한 달여 만에 병원에서 나오면서 합기도장에서 허리를 강하게 하는 운동법을 배웠다. 덕분에 다행히 수술하는 것은 면했지만 허리가 안 좋으면 늘 허리 건강 체조를 하곤했다.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런 그가 땅을 사서 어쩌라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팔월이 생일인 나에게 딸이 말한다. “엄마, 아빠가 엄마 생일날 써프라이즈 해 준대요.” ‘무슨..’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아무 것도 모르는 딸에게 너의 아버지는 ‘이렇고 저렇다’라고 할 수 있을까. 세대가 다른데. 애써 말을 참고 물끄러미 딸의 얼굴을 쳐다본다. “아빠가 충주에 땅을 샀어요. 엄마 놀래킬려고 말을 안했대요.” ‘너의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누구를 놀래킬려고 하는 사람은 더욱 아니고, 아마 무언가 생각해서 샀을 거야.’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언제부턴가 그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모양 빠지게 맘에 안 든다고 남들처럼 소리치고 사네 안사네 하는 것은 도리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 사람 같이 멋지고 훌륭한 사람은 없다. 다른 남자들처럼 말썽을 부리거나 사고를 치거나 하지 않는다. 말을 잘 안 한다는 것 밖에는. 그런 그가 부쩍 몇 해 전부터 해외로 여행을 가곤 했다. 동남아 근처를 한 달 두 달씩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달랑 여행 가방 하나 들고 슬리퍼를 끌면서 나가버린 것이다. 다치거나 나이가 들었으니 병이 날 수도 있겠다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연락이 없을 때는 덜컥 겁이 났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미 나가버린 그를 말릴 재간이 없었기에 억지로라도 참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일단 실행하고 수습하는 성격이라 주변에서 누가 말려도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딸아이는 그런 아빠가 외국에 나갈 때면 안절부절하면서 걱정을 태산같이 했다. 얼마쯤 있다가 돌아와 가족끼리 만났을 때 딸아이가 난생처음 우는 것을 보았다. 아빠 걱정이 많은 딸은 아빠의 건강이 좋지 않을까 봐 조바심을 했다. 물론 나도 그렇지만 불가항력이라는 생각에 참고 있었다.

어쩌면 운명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은, 요즘 생각이다. 그가 땅을 사서 채마를 가꾸던 과실나무를 가꾸던 그의 운명이다. 얼마 후 그가 가족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아기 배추 묘를 사다가 골을 파고 배추를 심었다. 거기에 추신으로 다음 날은 무씨를 뿌린다고 했다. 이제 ‘고생문이 훤하겠다’고 느껴졌다. 왜냐하면 나는 그곳에 가지 않을 테니까. 아마도 삼 년 뒤에는 땅을 팔고 집으로 돌아오겠지. 평생을 살면서 그의 취미생활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단지 외국에 나가지 않으니 아프면 찾아갈 수 있고 병원에라도 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머잖아 가을 막바지 쯤 서리가 올 테고 그때는 김장할 준비를 해야 하겠지만 그런 것은 겁도 안 난다. 그가 연락도 없이 외국에 나가서 민박 여행을 하는 것이 겁이 나지 한국에 있는 것은 정말 아무런 걱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 여보, 농막에서 식사나 잘 해드시면 좋겠구료.’ 지금은이 정도 가벼운 인사로 마무리 될 테니까. 내 가슴에 오는 가을은 그저 붉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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