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동 시인 · 전 경기적십자사 회장
김훈동 시인 · 전 경기적십자사 회장

“그 사람의 증거는 그 사람의 발걸음을 보면 안다.”고 했다. 문인(文人)들의 모임인 수원문협에서 ‘참글’을 필자와 함께 일깨워가던 김운기 시인이 세 권으로 엮은 묵직한 분량의 ‘아들에게 쓴 퇴계의 편지’를 보냈다. 책을 받고 놀랐다. 먼저 ‘퇴계(退溪)’라는 글자에서다. 한문으로 된 이황의 글을 국역(國譯)했다는데 또 한 번 놀랐다. 건축가로서 나와 같은 시인으로 활동하는 문우(文友)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퇴계 가서(家書)에 나타난 교학양상연구’로 한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자료로 퇴계가 아들에게 쓴 편지에 주목했다. 3,000여 통에 이르는 많은 편지 중에 아들에게 쓴 531통 전체를 완전하게 번역했다. 세 권에 담겨진 편지 완역(完譯)은 김운기 시인이 처음이라는 데 다시 놀랐다. 퇴계 가족 간에 오간 가서(家書)는 다른 학문적 성과에 비하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아마도 가정의 일상은 소소하게 여겨진 탓일 듯하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간 편지에는 가정사의 민감한 사실과 퇴계의 속내가 고스란히 들어난다. 김운기 시인이 여기에 눈을 돌려 가공되지 않은 편지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부모들에게 자녀교육의 해법을 일깨울 수 있게 했다. 450여 년 전 퇴계의 자녀 가르침이다. 오늘날 전통적인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때에 그가 펴낸 책은 인생의 지침서다. 책마다 뒷면에 한문 원문(原文)이 실려있다. 문장마다 어려운 낱말은 주석(註釋)을 달아 알기 쉽게 풀이했다.

편지, 서간문(書簡文)은 문학장르로는 수필이다. 고백의 문학이다. 퇴계의 자녀에 대한 가르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심하고 열정적이었다. 삶의 원칙이나 신념이 없다면 어렵다. 요즘 아버지의 길은 힘들다. 아버지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집보다는 직장에 더 얽매어 산다. 자녀교육에 나 몰라라 하는 동안 가정에서 설 자리가 좁아졌다. 자녀교육은 엄마가 주도하고 아버지는 자녀가 커갈수록 외면당한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가 가족의 일원으로 귀환(歸還)해야 한다는 걸 일깨워 주는 좋은 교본(敎本)이다.

자녀교육에 편지를 통한 ‘서신 교육’은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을 빼놓을 수 없다. 편지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때보다 감정을 순화시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적 효과가 훨씬 크다. 화가 날 때 얼굴을 보고 말하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오히려 잃는 게 더 많다. 퇴계와 다산처럼 편지를 쓴다면 가정교육은 절로 이뤄지지 않을까. 필자도 50여 년째 가족기념일에는 자녀들에게 축하의 뜻을 담아 격려 편지를 보내 좋은 반응을 얻는다. 퇴계는 두 아들을 뒀다. 맏아들 준(儁)과 일찍 죽은 둘째 채(菜)다. 맏아들 준에게 613통을 보냈다. 아들을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한 아버지 이황의 모습이 편지 글귀마다 담겨있다. 뜻을 세워라, 국법(國法)은 지엄한 것이다. 분수를 넘지 마라. 등으로 나눠진 ‘아들에게 쓴 퇴계의 편지’ 속에는 아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과거시험에도 합격하고, 남들같이 벼슬도 하여 입신출세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대학자 퇴계도 자손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음을 알 수 있다. 선비로서 교양과 인품을 갖출 것, 대인관계에서 구체적인 행동거지 등을 세밀하게 알려주는 아버지로서 퇴계 이황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값진 책이다.

분명 퇴계 이황은 자녀교육의 대가였다. 노심초사하며 공부법, 재산관리, 인간관계 등 앞날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아버지로서의 잔소리가 아니라 진심 어린 애정이 담긴 친절한 당부의 마음이 행간마다 담겨져 있다. “이제부터라도 네가 힘써 공부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지나간 시간을 따라잡기가 힘들 것이다. 끝내 농사꾼이나 군졸같은 일생을 보내려고 하느냐? 부디 유념하여 결코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부하는 아들이 다른 일에 빠질까 봐 염려하는 아버지의 정(情)이 절절히 묻어난다.

퇴계 이황에 대한 철학적 이론은 나라 안팎으로 많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생활인으로서 퇴계의 삶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김운기 시인이 펴낸 ‘아들에게 쓴 퇴계의 편지’에서 퇴계의 진면목(眞面目)을 엿볼 수 있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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