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종 편집인
김인종 편집인

수원을 대표하는 상징을 한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일 것이다. 조선 제22대 국왕인 정조의 명으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간 수원화성은 1796년 9월에 완공됐는데 자료에 의하면 둘레만 5,744m에 면적은 130ha 규모의 성이다. 
수원화성을 건설한 정조는 정말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11세의 나이에 할아버지였던 영조의 손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갇혀 죽은 임오화변(壬午禍變)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해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와 함께 정치적으로는 정조 본인의 정책을 줄곧 반대해온 벽파가 있었고,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끊임없는 암살 위기에 시달리며 평생을 불안 속에 지냈다.
이런 그가 치세 중반기에 접어들 때부터 자신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새로운 이상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수원화성이었는데 자신의 왕권 강화와 상인들의 유통 촉진이라는 효과를 기대했다, 또한 일설에 따르면 훗날 자신의 왕위를 아들인 순조에게 물려주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면서 아버지를 추숭(追崇)하려는 계획까지 있었다고 하나 일찍 병사하면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렇듯 효(孝)를 잘 보여주는 역사의 대표적 인물이 정조였고 200여 년 전 그가 만들었던 수원화성은 현재 수원의 랜드마크이자 훌륭한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업적들을 잘 알고 있던 故 심재덕 전 수원시장은 재임 당시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처럼 이른바 ‘정조대왕동상’ 건립 및 설치를 추진했다. 그러나 건립 장소로 예정돼있던 현재 성신사 부지가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이유로 설치할 수 없게 되자, 현재 팔달산 중턱에 있는 신풍배수지 부지 위에 설치했다. 그리고 2003년 공식 제막식을 통해 시민에게 전면 공개됐으나, 접근성이 떨어지는 위치에 있어 수원에 오래 거주한 시민 대다수도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던 채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에 지난 4월에 수원의 희망찬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김용서 전 수원시장을 추대하면서시민단체 ‘수원미래희망’을 발족했다. 그리고 첫 사업으로 팔달산 중턱 신풍배수지에 있는 ‘정조대왕동상’을 화성행궁광장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업 추진의 효율성을 위해 모임과는 별개로 특별조직인 정조대왕상 이전 추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동상 이전 추진 과정으로 간단한 설문조사 이후 시민 대토론회를 오는 19일에 개최한다. 진행 상황이 궤도에 올라가면 수원시와의 협의를 거쳐 함께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전이 완료되고 나면 나혜석 미술대회처럼 ‘정조대왕동상 그림그리기 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정조의 뜻을 이어나가겠다는 목표까지 세워두고 있다.
김용서 회장은 “동상 이전작업이 성공한다면 관광인프라 구축은 물론이고 슬럼화되고 있는 영동시장, 남문상가 등 팔달문 인근 상권들이 재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며 긍정적인 미래를 제시했다.
이어 “어느 나라 어떤 도시가 됐든 선진화되고 계획도시로 가기 위해선 문화와 스포츠가 융성하게 발달돼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매년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이 수원을 방문하는 이유도 수원화성이라는 훌륭한 역사적 자산을 비롯해 스포츠 인프라 등 문화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볼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조대왕동상이 화성행궁광장 앞으로 이전한다면 그 효과는 훨씬 더 커지고 배가될 수 있다.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동상처럼 정조대왕동상도 요즘 말로 ‘핫플레이스’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본래 수원의 정체성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고민해본다면, 그리고 모두에게 이로운 뜻이 있는 사업을 추진한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김용서 회장의 동상 이전 추진은 충분히 타당하고 가치 있는 제안이라 여겨진다. 다시 한번 미래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존재한다는 격언을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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