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기상학적으로는 보통 9∼11월을 뜻하나, 천문학적으로는 추분(9월 23일경)부터 동지(12월 21일경)까지를 말하고, 24절기상으로는 입추(8월 8일경)부터 입동(11월 8일경) 사이를 일컫는다.

늦가을은 영어로 ‘late autumn’이라고 쓰지만 때때로 ‘late fall’ 이란 표현도 쓴다. ‘fall’은 주로 패션계에서 쓰는 가을 표현으로 ‘떨어지다’란 뜻도 담고 있다. 아마 낙엽이 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양놈들이 그런 표현을 쓴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필자 역시 ‘autumn’보다는 ‘fall’이 좋다. 살짝 센티멘탈(sentimental) 한 어감과 중력을 벗어날 수 없는 추락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서 필자도 한때는 상실의 가을에 대해 이렇게 주절거리기도 했다.

“가을이면 사람들이 실성을 한다. 가을이면 사람들이 방황을 한다. 가을이면 바람이 길을 잃는다. 가을이면 산들이 이별을 준비한다. 가을이면 강들이 슬픔에 젖는다. 가을이면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들로 인해 길들이 쓸쓸해진다. 이모든 것들을 정신 나간 가을이 밤을 꼬박 세워 서리에 쫒기며 지랄하듯 연출을 한다.”라고.…

인간들은 대부분 가을이면 특히 늦가을이면 잠시 이유 없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이 조화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긴 질곡의 여정에서 잠시 나마 센티해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 치열하고 팍팍한 현대생활에서 때론 느림의 미학과 상실의 미학으로 인생의 여백을 즐길 필요가 있다. 혹자는 경지에 이른 인간을 ‘여백을 잘 활용하는 인물’이라고 그랬다. 여백은 시·공간미학의 절정이다.

여백의 미학하면 문득 떠오르는 공간이 있다. 우리나라 여백공간건축미학의 절정인 종묘는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20여개의 기둥에 의지해 대지에 낮게 내려 앉아 불가사의할 정도로 침묵이 감도는 빈 공간을 가지고 있다.

가을의 종묘는 외로움이 묻어있는 처연한 공간의 미학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종묘는 여백으로 삶과 죽음을 초월한 공간을 만들어 놓은 곳이다. 이것 또한 가을이 주는 인생여백의 깊이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누구나 성공을 바라고 행운을 바란다. 사람들은 대개 성공과 행운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것에 기인하고 가득 채워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늘 바쁜 일상에서도 한 박자 쉬어가며 삶의 여백 속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사람들에게 성공의 기회가 더 많이 오는 것이다.

‘월터 크라이슬러’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성공이란 기회가 문을 두드릴 때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뒤뜰의 네잎클로버만 찾고 있다고 했다. 뒤뜰의 네잎클로버를 찾기보다 한 번 호흡을 가다듬어 섬세하고 진지한 눈으로 가을 단풍처럼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는 성공의 기회를 잡아보는 방법을 택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가을이 여백의 여운도 있지만 또 다른 하나의 느낌은 상실에 대한 아쉬움인 것 같다.

우리나라 작가들 중 가을을 예찬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이 진정 사랑했던 것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상실에 대한 사랑은 좀 슬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귀하고 경건해 보이기도 한다.

가을의 상실이 광기의 여름을 밀어내며 겨울의 침묵을 가져왔고 이어 봄의 태동을 이어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가을은 소멸과 생성의 고리인 것이다. 겨울이 움츠리며 동면으로 들어가는 가기 전, 스러져가는 모든 것들에게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계절이 가을일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한 낮의 열기는 지나간 여름의 끝자락을 아쉬워 하지만 나뭇가지에 몇 개 남지 않은 잎들을 떨구는 바람으로 이별을 예고한다. 가을속의 사람들도 가을의 순리에 따라 보내고 맞음을 반복 할 것이다.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 태고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우린 늘 새롭게 헤맨다. 그래서 가을이 더욱 새로운 여백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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