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청렴과 공평무사 정신 잊지 말아야”

 

김희겸 경기도 행정1부지사
김희겸 경기도 행정1부지사

87년 부친 권유로 공직 입문
아내와 세 딸 든든한 지원군
31년간 다산 정약용 정신 실천
경제·복지·안전 전문가 우뚝
앞으로 무어든 해낼 내공 쌓아

"도 외자유치과장 재임시 IMF 극복 가장 큰 보람"
"日 보복, 경제발전 기회로새로운 경기·공정한 세상"
   
입추가 딱 2주 지났다. 가을의 코빼기가 보일 때도 됐는데 오전의 햇살은 아직도 한 여름의 끝을 붙잡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경기도청의 하늘 한 가운데 쯤에도 실구름 몇 개가 지루한 늦여름을 즐기고 있는 느낌이다. 청사 옆 팔달산 벚나무 군락 뒤론 아직도 매미가 우는지 아니면 ‘이명’인지 귓속에 사이렌 소리가 지나다닌다.

인터뷰 약속 시간인 10시보다 20여 분 일찍 김희겸 경기도 행정1부지사실에 도착했다. 도청 국·과장들의 결재가 진행되는 지 서류를 옆에 낀 중년의 인물들이 분주하다. 초입부터 다정하게 맞아주는 정상근 비서의 친절을 온 몸으로 받으며 카메라를 조립하고 일행과 부지사 방에 들어서니 180센티는 되어 보이는 훤칠하고 깔끔한 비주얼의 미소년(?)이 우리를 반긴다. 

일전에 집무실에서 차도 한잔 마시고 또 큰 행사나 브리핑석상에서 몇 번을 마주했는데도 늘 모습이 새로운 건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정갈한 신선함 때문일 것이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배우 ‘존 쿠삭’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한국배우라면 ‘박해일’에 가깝다. 한 마디로 틀이 좋다는 얘기다. 콧날이 일품이다. 조각 같은 외모에 깔끔한 피부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세월의 흔적이 ‘리처드 기어’처럼 머리칼에서만 군데군데 은빛으로 묻어 날 뿐, 하얗고 볼그스레 홍조를 띤 피부는 천생 싱싱한 청년 같은 느낌이다. 재미있다는 느낌과 함께 과거 먼발치나 근거리에서 보던 정리되고 깐깐하다는 느낌이 멀리 달아난다. 강단에서 매우 지적인 강의를 막 끝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책장에 교재를 꼽는 청·장년의 교수님 같은 느낌이다. 인터뷰가 시작됐다.

교편을 잡으셨던 아버님의 조언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버님의 조언이 정말 감사하단다. 자율을 강조하시는 정의로운 분이라고 했다. 반면 성격은 불같고 칼 같으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공직생활을 시작 할 때 청렴을 유난히 강조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도 말했다. “공무원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도적질 밖에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니 청빈(淸貧)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아버님의 말씀을 새기며 공직생활을 한지 벌써 31년이라고 한다. 장구한 세월의 공직생활 중 특히 경제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해왔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그는 공직을 수행하면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강조한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정신을 자주 되새겨 본다고 말했다.

87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경기도에서 공직생활 초창기에 법무담당관실 송무계장직을 수행하며 행정심판 등의 업무를 담당할 당시 매사 원칙대로 처리한 기억들이 새롭다고 했다. 당시 소신은 “안 되는 건 안 된다”였다고 한다. 그래서 미움도 일부 받았을 것이라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로 인해 주위로부터 융통성이 없고 정무적 감각이 부족하다는 말도 들었지만, 자신은 좋은 상사들을 잘 만나 훌륭한 지도와 보살핌을 받고 동료들이 마음으로 믿고 도와주어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된 것 같다고 소회했다.

IMF 당시 임창렬 경기도지사를 모시고 외자유치과장으로 일할 때에는 새벽에 출근해 ‘이따 봅시다!’가 평소 퇴근 인사가 될 정도로 자정이 너머 집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고, 임지사와 유럽출장을 갔을 당시엔 암 투병으로 탈모가 심해진 아버님의 모자 하나 살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한 동료 직원이 국내 한 백화점에서 구해준 모자를 아버님께 드릴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 일이 가슴에 남아 후일 밴쿠버 출장 시 잊지 않고 모자를 사다 드렸지만 계절에 맞지 않아 제대로 쓰지 못하셨다고 한다. 아주대에 입원한 아버님 병문안도 제대로 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99년, 결국 만 63세를 일기로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올해가 벌써 20주기가 되었다고 한다. 눈가에 살짝 물기가 어린다.

그리고 자신은 일복이 많아서 그랬는지 큰 재난이 터질 때마다 많은 경우 그 중심에 있었다고 했다. 2014년 경기도 행정2부지사 재직 시 발생한 세월호 사건 때는 당일 바로 안산시 상황실과 단원고를 거쳐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간 이래 3개월 동안 매일 안산의 경기도 사고대책본부를 지켰다고 했다. 

고양 종합터미널 화재, 판교환풍구 붕괴사고, 의정부 화재 등 경기도의 크고 작은 재난 현장엔 늘 땀을 ‘뻘뻘’흘리는 그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인연으로 2015년 국민안전처 재난관리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경주 지진, 태풍 차바 등 각종 국가재난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관계로 22개월 재직하는 동안 2~3개월에 한 번씩 밖에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고도 했다.

그는 또한 2005년에는 경기도 보건복지국장으로 복지 분야에 대한 현장 경험을 했고, 이를 계기로 2007년 행정자치부 근무시절에는 대통령소속 주민생활전달체계개편 추진위원회에서 복지전달체계를 개편하고 동사무소 명칭을 현재의 동주민센터로 바꾸는 업무도 담당했다고 한다. 이렇게 국가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던 그는 2000년 외자유치 공로로 ‘국무총리표창’을 받았고, 2007에 국가사회발전 기여로 ‘대통령표창’을, 그리고 2013년에는 국가사회발전 유공으로 ‘홍조근조훈장’을 받기도 했다.

가족사를 묻는 질문엔 대학 동창인 부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셋’ 있다고 했다. 딸들이 너무 착하고 훌륭하게 자라주어 고맙고 행복하다고 했다.
첫째는 고대 경영학과를 졸업해 현재 삼성전자에 근무 중이고, 둘째는 서울대 기계공학과 4학년 재학 중이며, 막내는 금년에 성균관대 전자전기학부에 입학했다고 한다. 특히 둘째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어렸을 때 눈 건강을 생각하여 책을 못 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벌일 정도였다고 했다.

두 딸들은 방학 중에도 학원이나 학교 식당에서 시급을 받으며 삶의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한다. 딸들이 사회 경험을 통해 돈의 가치와 사회 현실을 이해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그저 고맙고 대견할 따름이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아내 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내가 뇌수술을 2번씩이나 받으면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해 온 것이 눈물겹도록 고맙다고 했다.

결혼 과정을 묻는 질문에 고3 졸업 직전에 친구들과 함께 수원의 종로에 있었던 한 음악다방에서 가진 첫 미팅에서 껌 종이를 골라 지금의 아내를 파트너로 만났다고 했다. 거의 “응답하라 1988” 수준이다. 하지만 애프터 약속 없이 헤어졌는데 성균관대학교 합격자 발표식 날 대자보 앞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같은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같은 단과대학에다 수원에서 전철을 타고 통학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서로 좋아하게 되었고, 8년 8개월간의 연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했다. 김희겸 부지사는 평생의 동반자로서 자기 자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해주며 용기와 조언을 주는 아내가 너무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천금같이 예쁜 딸들을 셋씩이나 갖게 된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특히 막내 딸 출산 때에는 병원에도 가보지 못해 늘 빚진 마음으로 산다고 했다. 그리고 공부보다 건강과 화목의 중요함을 강조하며 애틋한 가족 사랑을 보였다. 1350만 인구의 삶과 안전을 책임진 경기도의 2인자라기 보다는 그는 천생 자상한 남편이며 자상한 딸 바보 아빠라는 생각이 든다.

행정1부지사로 수원에 다시 오기 전까지 약 5년간 혼자 떨어져 지낼 때에는 거의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가족들과 전화통화를 했으며, 지금도 5인 가족 단톡방을 만들어 일상을 공유한다고 했다. 인터뷰 당일인 8월 22일 아침 가족 단톡방에서 딸들과 함께 한 대화와 이모티콘을 보여주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그의 모습에서 딸 바보 아빠의 모습이 물씬 풍긴다.

인터뷰 말미에 새수원신문 김인종 편집위원장이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한 질문에는 잠시 뜸을 들이기도 했다. 아쉬움이리라! 일단 친구들은 많다고 운을 뗐다. 하지만 공직생활에 몸담다 보니 일반 직장인처럼 교우관계가 쉽지 못해 늘 미안하다고 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당시 많은 친구들이 찾아와 상을 치룰 때 자신의 일처럼 헌신적으로 도와줘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고 했다. 그 이후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을 때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최대한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다.

학창시절 자신은 ‘범생이’측에 들었지만, 오히려 약간은 껄렁한 친구들이 좋았다고 했다. 공부보다는 자신의 정체성과 삶에 충실한 친구들과 어울렸다고 했다. 그 표현과 동시에 필자에게 악수를 청하는데 선비 같은 손을 예상한 것과는 달리 손이 크고 악력이 묵직했다. 순간 무장이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희겸 경기도 행정1부지사는 화성 반월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수원으로 이사와 수원에서 인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북중학교와 유신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수원에 수많은 인맥과 기반을 갖고 있다. 중앙정부와 경기도에서 두루 요직을 거치며 엄청난 행정경험들을 쌓아 왔다. 경제, 복지, 그리고 안전까지 정말 완벽해 보인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도 거뜬하게 극복하고 무슨 일이든 해 낼 것 같은 대단한 내공의 소유자로 보였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란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오늘 같이 상대가 부럽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예정된 1시간 보다 40여 분이 오버 된 인터뷰가 마치 일분처럼 느껴져 많이 아쉽고 새로웠다. 배웅하는 김희겸 경기도 행정1부지사의 모습에는 반듯하고 강직한 인간의 모습과 섬세하면서도 슬기로운 공직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 고등학교 시절 대학입시와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교편을 잡고 계셨던 선친의 조언에 따라 공직자의 길을 가겠다는 생각으로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 후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공직의 중요성을 재삼 느끼게 되어 행정고시에 도전하게 되었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2학년 때인 1987년 제31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직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지방 행정의 일선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 같아 수습을 마친 후 당시 내무부를 지망하여 경기도에서 공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공직에 임하는 자기만의 가치관이 있다면?
 - 공무원은 단순한 직장인이 아니라 국민 행복과 국가 발전을 위해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공무원은 일반 직장인과는 구별되는 공직관을 갖추어야 하며 개인의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우선하고 청렴과 공평무사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 가를 파악하여 국민의 뜻에 따라 일을 해야 하고 또한 눈앞의 작은 이익이 아니라 공무원으로서의 자존심과 원칙을 지키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울러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충분한 업무 역량과 높은 인격적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공직생활 중 가장 보람을 느꼈던 시기는?
- 지난 4월로 공직에 재직한 지 만 31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경기도와 중앙부처에서 많은 일을 하며 보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IMF 이후 민선 2기와 민선 3기에 걸쳐 경기도에서 외자유치과장, 투자진흥관 등으로 일했던 5년간이 가장 보람이 큰 기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당시는 외환위기로부터 국가를 구한다는 생각으로 지방정부에서는 다소 생소하였던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새벽까지 일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특히 LG-필립스의 파주 투자유치 건은 수도권 규제로 인해 경기도 입지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을 중앙정부를 설득하여 관련 법령을 개정하며 이뤄냈던 성과로서, 파주를 비롯한 경기북부 지역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 경기도정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부문은?
- 경기도는 민선 7기 이재명 도지사 취임 이후 ‘새로운 경기, 공정한 세상’이라는 슬로건 아래 ‘공정·평화·복지’의 가치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지역화폐, 청년기본소득, 공공분양 아파트 후분양제, 관급공사 건설원가 공개 등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여 많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대내외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미ㆍ중간의 무역 무찰과 일본의 반도체 경제 보복 등으로 국내외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 양극화와 실업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양극화 해소와 일자리 창출,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한 다양한 정책개발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 민선 7기 2년차를 맞아 일본 수출 규제 등 대내ㆍ외적 위기 상황에 대한 경기도의 경제 위기 극복 방안은 ?
- 지속되는 미ㆍ중 무역 갈등 등으로 인해 반도체를 포함한 도내 주력 품목의 수출 환경이 악화되고 있어, 경기도의 하반기 경제성장률은 작년(3.8%) 보다 낮은 2.8% 이하로 예상되는 데, 이는 ‘18년 말에 예상했던 2.9%보다 하향 조정된 것입니다.

경기도는 어려운 경제 상황을 냉철하고 엄중하게 인식하고 경제위기 극복과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입니다. 특히 일본 수출 규제에 따른 도내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부품 국산화 등 기술개발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이번 제3회 추가경정예산에 321억 원을 반영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기업의 R&D 기반 조성, 수출 지원과 규제 개선을 적극 추진할 것이며, 서민경제 안정을 위해서도 지속 노력할 것입니다. 앞으로 관련 기관 및 단체들과 협력하여 현재의 위기상황을 잘 극복하고 우리 경제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과 기술 독립을 완성하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 중앙정부 재난관리실장을 지낸 경험으로 경기도의 안전에 대한 정책은?
- 행정2부지사로 근무하는 동안 세월호 참사,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판교환풍구 붕괴사고, 의정부 아파트 화재 등 유난히 많은 대형 재난·사고를 겪었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22개월간 국민안전처와 행정안전부의 재난관리실장을 지냈습니다.

크고 작은 재난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발생할 것이며, 선진국이나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어떠한 자세로 대비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피해의 규모와 사회적 파장이 달라집니다.

재난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국민 개개인이 안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함께 참여해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기도에서는 자연 재난이나 각종 사회 재난에 사전에 체계적으로 대비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평소 시군, 유관기관 및 시민단체들과 협력하여 매뉴얼을 정비하고 그에 따른 훈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 중앙과 지방정부의 요직을 거치면서 느꼈던 중앙과 지방의 바람직한 소통 방식은 ?
-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모두 국가 발전을 위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의 개별적인 사정을 고려하기 보다는 전국을 대상으로 통일적인 행정을 하려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지방정부는 스스로의 책임아래 자율적인 행정을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앙과 지방은 서로의 입장에서 상호 대등한 협력적 파트너십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이나 사업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 회의 등을 통해 이견을 조정하고 소통하는 노력을 더 많이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섬세한 외모에 비해 강단이 있다는 평이 있는 데 본인 생각은?
- 대인 관계에 있어서 공과 사를 구분하고, 정책 결정이나 사업 추진 시 원칙에 충실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매사에 최선을 다해 제대로 잘하려는 자세로 일하고 있으며, 국가 발전과 국민 행복을 위해 공직자로서의 본분과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강단이 있거나 카리스마 있는 이미지로 비쳐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이나 친구들로부터는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웃음


▲ 부지사만의 좌우명이 있다면?
- 공직을 수행하면서 배운 것 중의 하나가 일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함께 하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사에 부끄럼이 없도록 당당하게 임하자’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고, 무슨 일이든 뜻을 갖고 ‘하면 된다!’는 자세로 성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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