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초 대기자
김동초 대기자

‘쩐(錢)’은 세상을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 
필수적인 게 아니라 절대적이라고 해야 맞지 않나싶다. 하물며 남녀 간의 사랑도 ‘쩐 ‘이 좌지우지(左之右之) 하는 세상이다. 옛날 사내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主君’에 게 목숨을 내어놓고 여인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내 앞에서 옷고름을 풀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쩐’을 위해서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슬픈 세상이다. “가난이 ‘門’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窓門’(창문)으로 나간다.”라는 말이 있다. 이건 男 · 女에게 모두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남자는 돈 있으면 딴 짓을 하고 여자는 돈이 없으면 딴 짓을 한다고 한다.” “과거가 있는 남자는 용서해도 ‘쩐’이 없는 남자는 용서가 안 된다고 한다.”이래 저래 “돈돈”돈(錢)이 최고가 되는 세상이다. 

‘정치’(政治)권력보다 쎈 게 ‘言論’(언론) 권력이다. 요즘 정치판에서 무수히 증명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권력을 은밀히 조장하며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 ‘經濟‘(경제) 권력이다. 정치나 언론의 지향점은 결국 ’富’(부)의 축척에 있다. 모든 욕망의 끝은 재물로 귀결된다. 

대통령의 집권은 유한해도 ‘이병철’ · ‘이건희’ 그리고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경제 권력은 거의 무한한 것 같다. 세간에 화제가 됐던 삼성의 모 그룹간부에게 보낸 권력기관들의 고위직 인물들이 아부와 청탁성 문자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봉건시 대군주에게나 사용할 법한 문자들을 보면 낯이 뜨거울 지경이다. 

영화 내부자들의 정점도 결국 권력을 통한 재물의 취득에 방점을 찍었다. 재물과 권력은 ‘샴쌍둥이’의 한 몸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재벌들의 성장 동력 일 순위가 ‘政經癒着’(정경유착)이었다. 부동산을 통한 자본의 축척이 기업발전의 제일 커다란 지분 이었고 그 정보는 실세 권력들을 통해서 은밀히 거래 돼왔다. 

이에 문재인정부가 과감하게 그 적폐를 제거하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저항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재벌들이 그들의 정당한 몫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데 실세 권력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눈부셨다. ‘최순실 국정농단사태’ 가 최고의 정점이 아니었나 싶다. ‘최순실’은 개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카르텔‘과 같다. 

작금 문재인 정부가 선두권에 내건 공약인 일자리 문제도 결국 대기업의 ’꽃놀이패‘나 다름없다. 자본주의의 성패는 “거대기업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대기업이 협조를 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적자생존법칙은 거의 개인이건 기업이건 유착을 통한 ‘인프라구축’이 일순위임을 보여 왔다. 미국의 경우, ‘철강 왕 카네기’나 ‘석유 왕 록펠러’ 등 시대적으로 선구안을 가졌다지만 국가정책과 산업혁명에 힘입어 교과서적인 발전보다 유력자들의 ‘커넥션’이 훨씬 더 우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인류가 필연적으로 맞이할 4차 산업혁명을 통한 인공지능 시대의 방점도 결국 재물이 될 것이다. 편리해진 문명의 이기가 새로운 실업을 양산시키고 찰리 채플린이 그토록 우려하며 풍자했던 물질의 역습이 그 시대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다가올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웨슬리 스나입스’와 ‘실베스터 스텔론’이 주연했던 “데몰리션맨” 같은 세상이 현실이 될 것이다. 인문학이 소멸되어가는 세상은 결국 ‘속물’들의 세상이 된다. 적당한 속물이 성인보다 나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속물, 즉 ‘쩐’의 노예가 되는 속물들의 세상은 ‘地獄’(지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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