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동칼럼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회장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많은 착오도 있지만, 무위무책(無爲無策)만큼 불명예스러운 것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안전을 자기 힘으로 지킬 의지를 갖지 않으면 어느 나라든지 독립과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나라가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전쟁을 좋아하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아무리 태평하더라도 국방을 소홀히 해 전쟁에 대비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국가의 기반은 훌륭한 군사조직에 있다.


조선왕조시대 무예정책을 펼친 이색적인 전시회가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다음달 22일까지 열린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원은 본디 무향이다” 효종실록에 실린 글이다. 무향 수원을 알리는 전시다. 수원은 예로부터 무풍(武風)이 강한 고을로 무예를 숭상하고 활쏘기에 힘쓰는 상무정신이 깃든 지역이었다. 상무 전통이 이어지는 수원의 무풍을 소개하고 그 절정기에 해당하는 조선후기에 펼쳐졌던 무예정책과 무신들의 활동을 통해 무향 수원을 알리는 테마 전시다. 수원의 또 다른 속살을 살펴볼 수 있는 참신한 기획이다.


정조대왕이 무예개혁을 위해 수원을 모범삼아 펼친 무예정책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눈길을 끈다. 수원화성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598년에 간행된 최초의 무예서인 『무예제보(武藝諸譜)』, 정조가 무예를 표준화할 수 있는 교본을 만들기 위해 무예제보와 무예신보를 집대성해 편찬한 최고의 종합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전시의 압권이다. 최근 『무예도보통지』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북한에 의해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역사는 힘의 부족이 전쟁을 가져옴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단병기예를 대비한 군사훈련에 힘쓰면서 무예연마와 진법 등 무예를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그 결과 『무예제보』가 편찬됐고 이어 무예 6기가 정립됐다. 무예서 편찬의 뜻을 계승해 사도세자는 무예 18기를 정립해 『무예신보』를 편찬했다. 국방강화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무예적 역량을 이 책에 담았다. 기존의 진법서 위주의 병서에서 삼수체제(三手體制)의 조선후기 기본 군사체제를 안정화 시킬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어찌 보면 조선의 무예를 변화시킨 장본인이다. 사도세자는 “지금이 비록 국가의 안정기라 하더라도 군사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며 더구나 효종이 북벌을 꿈꾸었는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더욱 무예를 닦아야 한다”고 편찬 이유를 밝혔다.


정조대왕은 무예를 표준화하기 위해 기존에 나와 있는 무예제보와 무예신보를 묶었다. 여기에 마상기예가 더해졌다. 바로 무예의 종합교본 『무예도보통지』다. 정조의 명에 의해 이덕무, 박제가가 저술하고 고증했다. 당대 최고의 무사인 백동수가 시연(試演)을 해 만들어진 무예서다. 책안에 그려진 도보(圖譜)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다. 정조는 장용영 장관·장교 군사를 선발할 때는 물론 복무 중에도 기회가 닿는 대로 무예24기를 시험했다. 정조는 재위기간 중 신하들과 함께 총 267회의 활쏘기를 할 정도로 활쏘기를 즐겼다. 상무정신에 입각해 문무를 겸비하기 위한 무예연마과정이자 무예를 권장하는 방법이었다. 정조시대 무예의 정수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계승해 오늘날 다시 우리의 무예로 삼고 세계적인 문화콘텐츠로 만드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수원시가 예산을 투입해 무예계승자를 양성하고 지속적인 무예시연을 위해 ‘무예24기 예술단’을 상설 운영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전쟁은 무지(無知)한 자에게는 거래이지만, 천재에게 있어서는 과학이다. 정조시대의 무예정책을 귀중한 고서와 자료를 통해 현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자못 크다. 현명한 군주는 안으로는 밝고 올바른 정치를 도모하고 밖으로는 무비(武備)에 힘써 적침에 대처해야 함을 읽을 수 있다. ‘무향 수원-상무 전통을 잇다’는 흩어진 무예 관련 자료들이 모여 또 하나의 공유 문화를 만들어 전시주제를 압축적으로 잘 들어낸  전시다. 무예전통과 상무정신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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