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도전정신이 원동력...소통·화합으로 체육회 이끌터

 

박광국 수원시체육회 초대 민선회장
박광국 수원시체육회 초대 민선회장

 

전기공사로 사업시작…숱한 역경 겪으며 성공 일궈
130만 인구 수원시체육회 초대 민선회장 중책맡아
“체육회의 조직편성·제도보다 소통·화합이 우선”
운동장·시설등 47개사업장 현장시찰 발빠른 행보
54개 종목단체 전수방문 통해 현안 꼼꼼히 챙길것

1920년 창립된 대한민국 체육회 역사에서 근래에 커다란 사건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2016년 6월28일 날 행해 졌던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의 통합이 첫 번째고 2020년 1월, 그간 100년 동안 경직된 관선체제에서 벗어난 민선 체육회장의 탄생이 그 두 번째다.

체육이 우리 일반시민의 생활 속으로 보다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시점에서 대한민국 최대의 지자체 130만 도시인 수원시 박광국 초대 민선체육회장의 인터뷰를 본지가 심층적으로 진행해 보았다.

박광국 수원시 민선초대 체육회장은 원적이 용인군 구성면 중리 242번지이며 본적은 수원시 고등동 199번지다.

박 회장은 성장 후 수원에서 형님의 전기사업을 도왔지만 형님이 사업에 실패한 관계로 한동안 방황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 79년경 한참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 기술력이 몹시 뛰어났던 ‘절친‘이었던 친구가 외국에서 성공하고 들어와 자신을 찾았다고 했다.

박회장은 친구와 ‘구천동’에서 만나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지난 얘기를 털어놓았고 함께 눈물을 글썽이며 당시 사업실패로 방황과 고통을 겪고 있었던 박 회장의 사연을 자기 일처럼 들어준 친구는 박회장의 재능과 인품을 높이 사며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큰돈인 1천만 원을 아무 담보나 보증 없이 선뜻 사업자금으로 빌려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82년 1월 ‘국제전기’라는 상호로 수원시 교동 2-35번지에서 사무실을 얻고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사업초기 한 2~3년 동안은 수금도 잘 안돼 봉급도 제때 지급을 못했고 심지어 집에 생활비도 못가져갔다며 몹시 힘든 시기였다고 토로했다.

‘미수금’과 정품원자재의 구입과 시공으로 사업이 최악의 상태로 빠지며 포기 수순에 접어 들 무렵 하늘이 무심치 않게 구원의 손길이 관에서부터 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도시로 인구들이 몰리던 시기였고 그래서 각지에 집장사들의 성행속에 참으로 최악의 어려운 시기였지만 박 회장의 모든 전기공사는 정품사용과 꼼꼼한 작업이라고 ‘알음알음’ 소문이 나있었던 차에 그런 소문을 타고 경기도의 한 공직근무자가 ‘자기 집’ 전기보수공사를 부탁했는데 박 회장의 완벽하고 깔끔한 일처리에 감탄해 동료들의 집안 전기보수공사를 계속부탁하며 ‘기사회생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당시의 주택들은 대개 전기공사가 복잡하고 부실한 상태였고 전기공사업체들이 대개는 정품보다 이문이 큰 ‘비품’들을 많이 사용해서 고장이 잦았던 관계로 전기수리 공사 요청이 꽤 많이 들어오던 시기였다고 했다.

하루는 시의 공직근무자가 자신의 집, ‘전기수리 공사’를 부탁했는데 그간에 그 집의 전기공사는 여러 곳에서 다녀갔지만 수리가 잘 안됐었던 곳이라고 했다. 그런 집을 완벽하게 전기수리 공사를 해주고 왔는데 후일 집주인이 “그 친구 도대체 뭐야”라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신뢰를 쌓기 시작했고 결국은 공직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박 광국회장의 전기공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 “그 친구에게 맡기면 틀림없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널리 명성이 퍼져나갔다고 했다.

여러 기관에서 박 광국 회장이 맡았던 전기공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짐에 따라 경기도 각지에서 관급 전기공사의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하는 박광국 회장의 모습에선 원칙을 지키며 일에 대한 정도를 걸었던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비쳐지기도 했다.

한 5년간은 엄청나게 주문량이 많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바빴고 결국 중고차 1톤 포토트럭을 구입해야 할 정도 호황을 누렸다고 했다.

자전거에서 벗어나 처음 트럭을 구입했을 때는 하늘을 날아갈 것 만 같았다고 했다. 소원했던 처갓집이든 어디든 갈 수 있는 의욕이 생겼고 기동력이 좋아지니 가성비가 높아졌고 어디서 주문이 들어와도 자신감이 생겨 하루하루가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서울 ‘청계천’으로 자재를 구입하러 가는 순간도 즐거울 정도로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뛰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86년 아시안게임’에서는 전기특수가 일어나며 호황기를 누렸다고 했다. 당시 서울이나 수도권거리에도 가로등이나 조명시설이 열악해 밤이면 거리가 암흑에 가까웠고 국가적 행사를 치르기에는 전기공사가 전국적으로 시급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해서 정부는 먼저 수도권의 조명시설을 보강하기 위해 가로등 및 보안등 전기공사가 다급한 상황에서 관공서 일을 많이 했던 실적과 신뢰로 ‘국제전기’가 공사의 상당량을 수주받기 시작했다고 박광국 회장은 술회했다.

2년후 치러진 ‘88올림픽’때는 정부가 범국가적 차원에서 조명공사를 활성화시켰고 신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양의 일을 수주하게 되었다고 했다.
노태우 정부 때는 분당에서 ‘주택 백만호 건설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궁극적으로 커진 사업의 외형에 따라 자연스럽게 종합건설의 필요성을 느껴 건설업계에 진출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종합건설은 사업의 규모나 범위가 전기공사보다 훨씬 컸고 범위도 넓었으며 후발주자라는 관계로 사업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결국 90년 대 말, 국가적 부도위기인 IMF가 닥치며 사업이 휘청거렸고 연대보증을 한 회사들이 도산하면서 그들의 채무를 합쳐 20억 원 가량을 모두 껴안아 사업이 점점 벼랑 끝으로 몰렸다고 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위기가 ‘찬스’가 된다는 말처럼 많은 건설사들이 IMF로 문을 닫고 살아남은 몇개 안되는 건설사들이 국가로부터 실력과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수주물량이 늘었다고 했다.

IMF이후 정부는 ‘건설산업기본법’이란 법을 제정해 제도적으로 부실업체들을 입찰에 참여 할 수 없게 가이드라인을 만들었고 그 격동기에서 살아남은 박광국 회장의 ‘국제산업’은 경영능력과 실적 등을 인정받아 다시 한 번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당시 대기업들의 ‘컨소시엄’ 참여 제의가 줄을 이었고 그런 바탕위에 승승장구하며 오늘날까지 사업이 탄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박광국 수원시 체육협회 민선 초대회장이 체육회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사업이 한창 번창할 당시인 88년 서울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체육이 한 국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라고 인식해 전국적으로 체육회를 결성 종목단체를 만들기 시작하던 시기였다고 했다.

경기도도 국가의 결정에 따라 ‘경기도배드민턴협회’가 설립되었고 한국전기공사협회 경기도 지회가 그 스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89년 3월 15일, 송재규 경기도전기공사협회회장이 경기도배드민턴협회 회장직에 올랐고 박광국 회장은 경기도배드민턴협회의 임원과 운영위원을 맡게 되었으며 그 것이 박광국 회장과 체육회의 첫 번째 인연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광국 회장은 1995년 3월 10일 드디어 수원시 농구협회 수석부회장(회장 유만진)을 역임하게 되었고 당시 전무이사는 실무를 꿰고 있던 선수출신의 최성일(현 수원시농구협회회장)씨가 맡았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최근 수원시 초대 민선체육회장 선거시 찾아뵀을때 반갑게 맞이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당시 최성일씨는 지근거리에서 늘 박광국 회장을 지켜봤고 꼼꼼하고 성실하며 원칙적인 업무를 진행했던 박광국 회장을 기억하며 한 말은 “당신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안다. 최선을 다해 돕겠다”며 몹시 반가워했다고 한다.

박광국 회장이 수원시 체육회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김용서 전 수원시장’시절이었다. 김 시장의 권유로 ‘어머니스포츠운영단’을 1년 반 동안 맡기도 했다고 했다. 김용서 전 시장의 집권 후반기였던 2006~7년에는 수원시체육회 이사직을 역임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리고 2010년 현 염태영시장이 당선되고 나서 전·후반기를 거치며 김용서 전 시장 시절의 임원들이 모두 교체되었지만 유일하게 박광국 회장 본인만 남게 되었으며 오히려 2012년에는 이사에서 부회장으로 승격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2016년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이 합쳐질 당시는 생체협의 최봉근 부회장이 전권을 행사하던 시기로 자신이 속했던 엘리트체육 소속의 임원들이 절반 이상 정리됐었다고 했다. 수원시 체육회는 초대 수석부회장에 생활체육출신의 최봉근씨가 임명이 되었고 박광국 회장은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자신은 지인의 조언대로 생활체육 쪽과 화합을 이루려고 노력하던 시기라고 했다.

최봉근 수석부회장은 선비 같은 분이였으며 2017년 수원시 새마을회장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2018년 1월 자연히 박광국 회장이 수원시체육회 수석부회장에 올랐다고 했다.

당시는 박광국 회장이 수석부회장이었지만 회장이 관선이었던 관계로 염태영 시장은 시정업무가 많아 결국 대부분의 체육회 업무를 박광국 수석부회장이 관장, 수원시 체육회를 이끌게 됐고 박 회장은 국제산업과 국제NGE 등을 성공적으로 일군 경험을 살려, 체육회도 경영의 합리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당시 체육회의 구성은 수석부회장을 정점으로 3개 파트로 분류되어있었다고 했다. 첫 번째,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국’이 있고 두 번째, 의결을 담당하는 ‘이사회’ 그리고 세 번째가 대의원 총회격인 ‘종목단체’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수원시체육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조직편성이나 제도가 아니라 ‘소통과 화합’이 시급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이에 박광국 수원시체육회 초대 민선회장은 금 번 회장직에 취임한 것을 계기로 수원시의 운동장이나 시설 등 47개 사업장을 모두 현장에서 문제점을 파악 소통과 화합을 통해 해결해 나갈 계획임을 밝혔다.

그리고 54개 종목단체를 전수 방문, 현장을 면밀하게 파악하며 전수 조사를 통해 재정비할 계획이라고 했다. 체육회 법제화를 통해서 예산 확보와 재정 창출을 위한 수익사업 결성 등 성장 동력을 구축할 계획임을 밝히기도 했다. 끝으로 박광국 회장만의 삶에 대한 ‘좌우명’을 묻자 거창하게 ‘좌우명’이라기보다는 ‘삶의 신조’란 표현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자”란 표현을 했다.

그리고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진실과 내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신은 아직까지 다수의 회사를 설립·운영하고 있지만 아직 한 번도 개업식이나 준공식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만큼 ‘형식’이나 ‘겉치레’를 지양한다고 했다.

박광국 회장의 모습은 한편으론 형식과 절차를 과감하게 건너뛰고 투철한 도전정신으로 대한민국건설의 신화가 된 정주영씨의 모습과 흡사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수원의 ‘리틀 정주영’같은 박광국 수원시체육회 초대 민선회장의 삶의 신조인 ‘책임’이란 단어의 의미가 너무 소중하게 가슴 속으로 스며든 아주 감동적인 인터뷰였다. ‘책임’ 참으로 소중하고 ‘진지한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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