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庚子年(경자년)’이 오며 ‘좌·우’로 갈렸던 세상이 제도권이 우선인 ‘울타리 안팎’의 세계로 더 심하게 갈라졌다. 조국 딸의 ‘논문저자’문제나 ‘표창장 위조’사건 문제에는 좌·우란 개념은 아예 없었다.

겉으로 진보와 보수(통칭 좌파와 우파)의 대립 같지만 결국은 상류층들의 세계, 다시 말해 상위 10%정도에 속한 인물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경쟁이다. 즉 울타리 안에 들어선 이들이 사회정의란 이름을 팔아 기득권 쟁탈전을 벌이는 소모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 해 가을, 수차례 열렸던 소위 SKY(스카이)라고 불리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의 ‘조국 딸’에 대한 반대집회도 울타리(제도권)밖의 학생들과는 아무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SKY급‘ 밖의 학생들이 95%이상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도 반 이상이나 된다. 논문저자니, 표창장이니 하는 단어들은 그들과는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다. 사회적약자인 이들은 항상 구제영역에 위치하나, 정치적으론 관심권 밖의 인물들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다.

목소리 또한 내기 힘든 현실이다. 아예 조국사태를 바라보며 참담함속에 울타리 밖에서 거대한 표밭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들을 대변할 만한 사명감이 투철한 정치인의 부재로 투표를 위한 일회용일 뿐이다. 쿠바의 ’체게바라‘가 그래서 아직까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조국사태도 상위 5~10%정도 사람들이 사회정의를 가장해 벌였던 그들만의 치열한 기득권 싸움일 뿐이었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학의 거두인 ‘토마 피케티’가 말한 ‘귀족좌파인 ’브라만 좌파‘와 ’부유층 들인 ‘상인 우파’의 대결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지식인과 부유층’들이 벌이는 대결로 상층 울타리 안에서 보호 받고 선택받은 이들이 정치란 제도를 이용해 계층유지와 ‘헤게모니장악’을 위해 벌이는 치열한 공방일 뿐이다.


이 현상에는 좌파라 불리는 이들의 본질이 변한 것도 한몫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대까지의 좌파들은 노동자와 농민 등 거의 저학력과 저소득층이 주류를 이루었고 또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는 불평등을 배척, 사회제도와 부를 공유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1980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진보나 좌파들의 학력이 높아지며 지식인을 위주로 한 계층이 생겨났고 평등을 위한 투쟁정신보다는 그 들만의 가치를 위해 투쟁을 벌이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우리나라 386세대의 등장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상위대학출신의 인물들이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며 진보좌파의 개념을 넘어 제도권 안에서 울타리를 형성, ‘부유우파’들과 철옹성 같은 울타리 안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투쟁이 아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그 들만의 막강한 힘으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헤게모니’ 장악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기생해야 하는 다수의 '언론'들이 온통 세상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으며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있다.

기득권의 확보가 최우선인 그들은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사회적 불평등'을 선호하게 되며 여럿이 '평등'하며 다수가 '똑똑'하고 '공정'이 우선인 세상은 가급적으로 '지양'하려하는 것이 본질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은 불평등'이고 작금의 우리나라가 꼭 그 짝이다. 탐욕의 ‘황금돼지’가 물러가고 ‘叡智(예지)’의 ‘백쥐’ 해가 왔다.


다시 한 번 속는 셈 치고 기대해 봐도 될까?

김동초 대기자

저작권자 © 새수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