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감정’을 극도로 존중하는 것. 문제는 ‘개개인의 감정 총합’이 크고 작음에 따라 삶의 구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가령 성소수자들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자신들의 감정을 표출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경우, 비판을 삼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신(神)이 동성애를 금지했기 때문에 문제를 삼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곳에서 벌이는 행위로 인해 다수의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주장이다.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존중받길 원하듯, 성다수자들의 감정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2015년, 이슬람 광신도들은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가 무함마드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편집장을 포함한 10명의 직원을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세상 사람들은 이슬람 과격 단체를 향해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비등한 반론도 제기됐다. ‘신(神)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그들을 테러한 것’이 아닌, 전 세계 수십억 이슬람교도들의 감정에 상처를 준 것 또한 문제라는 것이다.
즉 소수의 사람들 감정 표출이 다수의 사람들 감정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를 비롯해서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 등 모든 제도와 가치들이 과거의 그것과 전혀 다른 ‘개인의 감정’에서 비롯된다. 가령 신(神)의 명(命)이라는 이유로, 군주(君主)의 명이라는 이유로 밀어붙이던 시대에서 직접 민주주의에 가깝게 구성원들의 투표에 의해 세상이 운영되고 있고, 심지어는 예술 창조와 미적 가치의 원천도 ‘개인의 감정’에서 논하기 시작했다.
그래선지 오늘날 세상은 ‘자유시장’으로 평가된다. 자유시장에선 고객이 왕이다. 개인들의 감정을 위배해선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하지만 자유시장에도 정도(正道)는 있다. 개인의 감정은 최대로 발휘하되 다수의 감정을 해쳐선 곤란하다.
여러 매체를 통해서 고발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 다수의 감정은 고려치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감정만 표출한다는 점이다. 정치판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을 구현하는 곳에서도 쉽게 목격된다.
비근하게는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마구 행해진다. 민주화가 어느 때보다 만개하고 있는 오늘날, 통제능력이 상실지경인 듯한 ‘개인의 감정 조절 미숙’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는 점에서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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