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소상공인들의 희망찬 도전은 계속돼야죠”

 

정인성 수원시소상공인연합회 홍보이사

몇번의 고배 마시며 꾸준히 소상공인의 길 걸어
어려울때 눈에 뜨인 시 한편이 큰 힘이 돼
소담소담 카페 운영하며 9회째 시낭송대회 개최
시련 극복의 열매를 오늘도 이웃과 함께 나눠

12월 초겨울의 구 서울 농대 옆 서둔동 주택가 뒷길이 몹시 ‘소담’스러웠다.

길모퉁이에 자리한 소박하고 예쁘장한 조그마한 카페의 이름이 그래서 ‘소담소담’이었나 보다. 길가에 넉넉하게 자리한 거주자 우선 주차 란에 여유 있게 주차를 하고 들어선 카페에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숙녀가 무언가 시집을 읽고 있는 ‘소담’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벽면 여기저기에 비치된 소박한 시집들이 고객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고 자그마한 흥미를 유발시키는 크리스마스 디스플레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어 볼에 감기는 실내의 포근함으로 약간은 느슨해지는 감정이 인터뷰의 즐거움을 배가하는 순간이다. 

먼저 도착한 탓에 실내 풍경을 스케치 할 여유가 있었고 그런대로 카페공간에 익숙해질 즈음 적당히 짧은 머리의 남자가 카페로 들어섰다. 그는 취재진을 보며 환한 미소로 다가왔고 자기 자신을 소개 하는 데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바로 오늘의 인터뷰 주인공인 정인성 수원시소상공인연합회 ‘소담소담’시낭송카페의 대표였다. 인터뷰용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부탁했는데 행동과 자세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인터뷰말미에 알게 된 사실인 여러 대회에서의 시낭송 참가와 수차례 1등 수상 등의 경력으로 의문이 풀렸지만 문득 무대 체질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정인성 ‘소담소담’ 시낭송 가페 대표는 카페 운영외에도 ‘부산미도어묵’과 ‘수원화성 얼음’대표, 그리고 수원시 낭송가협회 부회장직과 수원시 소상공인협회 홍보이사직도 함께 맡고 있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적당히 짧고 곧은 머리카락이 스포츠맨 틱 한 분위기를 풍긴 연유 역시 그는 스포츠맨 출신이란다. 축구를 좋아했고 한때는 직장인 축구팀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경기도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고 했다.  정인성 ‘소담소담’ 대표는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가족이 모두 수원으로 이사했다고 했다.

수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군 입대를 앞두고 꽃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꽃을 배달하는 남자가 되기도 했다며 매력 있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군복무는 연천에 소재한 26사단에 입대를 해 보람차고 왕성하게 군 생활을 마쳤고 입대 전 ‘제브라’란 클럽축구팀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던 관계로 특채로 ‘필립스’란 회사에 발탁될 수 있었다고 했다. 

회사 근무 시 벌어진 전국 직장인 축구대회 결승전에선 결승골을 넣기도 해 그 순간의 영광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필립스에서 5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사업의 구상을 위해 한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 술도 한잔하며 인생사를 논했고 그 당시는 타고난 역마살로 새로운 지역도 찾아보며 겁 없는 한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한때는 남문시장을 거닐며 새로운 사업에 대해 시장조사를 하던 중 포목점 주인이 가게 안에서 커다란 몽치의 돈을 세는 것을 보고 포목점이 유망사업이라 생각한 정인성 대표는 점포 사장에게 ‘일’을 배우게 해 주신다면 월급 없이 근무하겠다는 당돌한 부탁을 했었던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며 여러 곳을 알아보던 중 교차로에 적힌 어느 ‘구인난’을 보고 전화를 한 곳이 ‘곰 표 국수상회’였고 마침 사장이 1인 사업을 하던 차에 일손이 부족해 채용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국수를 도매하는 업종은 장래성이 별로 없었는데도 한 번 하면 끝을 보는 성격으로 미련하게 수입도 없으면서 일 년 반을 지속해 근무 했었다고 했다.  정인성 대표는 당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을 정해 요일별로 수원의 권역을 정해 놓고, 영업을 다녔다고 했다.

월요일은 세류1·2·3동, 화요일은 권선·매탄동, 수요일은 고색·평동·서둔동·오목천동, 목요일은 파장·이목동, 금요일은 화서·영화·조원동 등을 돌며 조금씩 물건을 상점에 진열했고 토요일은 주문이 들어온 상점을 방문하며 후일을 위해 1년 반을 열심히 뛰어다녔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엄했고 주문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슬슬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며 위기가 왔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그간 자신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원의 각 지역을 돌며 열심히 살아온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나며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는 각 지역에서 소규모 ‘슈퍼’들이 OPEN을 하는 곳이 많았고 그곳에 물건을 진열해주며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된 관계로 거래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3년 차에 접어드니 주문물량이 늘어나 직원을 채용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국가부도사태인 IMF의 경제위기가 닥쳐 금융거래가 불안해진 상태에서 대리점 주인이 물품 대금으로 받던 가계수표·당좌수표·어음 등의 채권수령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유가증권들을 할인해 지불하면 15%대의 이익을 바라보고 하는 장사에서 이문이 거의 남지 않는 관계로 그 마저도 어려워 막막했었다고 그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위기가 곧 기회일 수 있다는 말처럼 주변에서 ‘나들이’라는 상호로 대림어묵 대리점을 차려 납품 사업을 하시던 분이 적당한 권리금으로 자기사업을 넘겨주겠다고 제의를 했고 용기를 내 인수를 결정, 드디어 ‘유진식품’이라는 자신의 대리점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 당시 사업자금은 아내의 꼼꼼한 자산관리 덕으로 인수자금이 마련됐었다며 아내에 대해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가게는 북문의 한국은행 뒤편에 있었고 젊은 나이였지만 그동안 현장에서 경험도 쌓았고 인맥도 제법 형성 돼 있던 터라 3년 정도 열심히 고생을 한 끝에 월 4억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탄탄한 사업으로 발전했다고 했다.

하지만 MB(이명박대통령)정부의 출현과 동시에 ‘친프렌들리’정책이란 이름으로 동네골목상권에도 롯데마트, 홈플러스, 이마트, 애브리데이 등 대기업의 대형마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1+1(one plus one)이란 정책으로 소형점포나 상인들의 경쟁력을 일시에 무너뜨리며 골목상권이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했다.

더욱이 대기업들이 부린 횡포에 정점을 찍은 것은 전에 그 지역에서 잘 가나던 소규모 슈퍼상가들을 거액에 인수해 기존에 거래처에서 납품된 물건을 회수하라는 통보와 함께 거래처가 끊어지는 현실이 도래한 것이다.

또한 회수한 물량은 단기식품으로서 싸이클이 짧아 거의 70%의 회수 품을 폐기해야 하므로 손해가 몇 겹으로 한 꺼 번에 닥친다고 했다. 결국 소상공인들은 그런 상황을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는 게 정인성 대표의 주장이다.

이에 정인성 대표는 자구책으로 감원과 긴축재정 등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 10년을 버텨왔지만 결국 채무도 생기고 새로운 정부가 출현해도 별 다른 방법이 없었고 마침내 모든 종업원을 퇴사시키며 사업도 정리를 하게 되었다고 힘들었던 시기를 소회했다.

정인성 대표는 그동안 사업을 줄여가면서 까지 힘겹게 버텨온 10년 이란 세월은 ‘절대고독’속에서 지독히 외로웠고 힘든 시기였다고 토로했다. 당시 직원들과 하루하루를 함께 버티면서 기다렸지만 점점 더 나빠지는 상황으로 직원들에게 더 이상 기다려 보라는 희망고문을 하기 엔 너무 늦었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정인성 대표는 적기를 놓쳐 3억 원 정도의 권리금을 받을 수 있었던 시기를 놓친 것을 무척 후회하기도 했다. 대기업에 도저히 맞설 수 없는 현실과 모든 것이 악화된 상황 속에서  정인성 대표는 알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거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시기였었다고 했다.

그때 눈앞에 다가온 ‘구원 빛’ 같은 ‘시 한편’이 등장했다고 했다.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은  것이라고 했다. 시 한편으로 삶의 징검다리를 하나 씩 건너가는 느낌이라고도 했다. 이런 과도기를 거치며 결국 대리점도 최소로 축소시키고 딸의 권유로 가게 안에 ‘소담소담’이란 시낭송카페를 운영하기에 이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인성 대표는 현재는 이익보다는 현상유지에 애를 쓰고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훨씬 여유로워지고 한결 마음이 풍요로워졌다고 했다. 단지 직원이 하던 배달 등의 일을 직접 할 때에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했고 새벽부터 일어나 거래처를 복원시키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사업정리 당시 탑동에서 임대해 운영하던 80평짜리 창고는 건물이 매각되는 바람에 장비와 시설물들을 이전해 새로 설치하는 것이 여건상 어렵고해서 포기하고 현재는 소규모의 공간에 얼음을 취급하며 수입의 한 부분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얼음은 계절상품으로 수익률이 30%정도로 높지만 성수기가 5개월 뿐인 관계로 생계를 위해 ‘미도어묵’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정인성 대표는 사업을 접고 축소 할 당시의 소회를 “그 동안 짊어졌던 무거운 짐들을 내리는 기분이었다”며 젊은이의 꿈을 어떻게 든 지켜내고 싶었지만 어려웠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정인성 대표는 2014년도 수원시에서 주최한 시낭송대회에 마지막 남은 참가 한자리를 얻어 시낭송을 했고 예상치 않게 1등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고 했다. 그 여세를 몰아 2년 후에는 전국시낭송대회에 참가해 그랑프리의 영예를 차지했으며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눈물이 났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수원시 ‘낭송가협회’에 가입해 꾸준히 ‘버스킹‘(밥차배식시 공연 등)을 통해 시낭송을 이어갔고 현재는 배우고 싶은 희망자들이 가입해 식구가 20여명 수준으로 늘어났다고 흐믓 해 하기 도 했다.

수원에는 최남선씨가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를 쓴 날인 11월1일(시의 날)에 매년 시민 시낭송대회를 열어 수준 높은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정인성 대표는 심사위원을 2년 째 맡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삶에서 ‘전쟁’ 같은 ‘사업전선’이라는 큰 짐을 내려놓고 시인이 된 것 같다며 행복해 하는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정인성 대표는 시의 장르를 가리지 않는 편이며 한자리에서 1~2편의 시낭송을 하며 현재까지 100여 편 정도의 시 암송을 한다고 했다. 매월 셋째 주 목요일 진행하는 수원목요시낭송회는  “행복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시낭송”이라고 했다. 벌써 9회나 진행했다한다. 소외됐거나 사회적 약자들과 힘든 사람들을 찾아가 시낭송을 통해 함께 행복을 찾고 싶다고 소박하게 말하기도 한다.

현재는 주위에 가까이 있는 평범한 보통사람들과 시를 통해서 행복을 향해 잔잔하게 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3년 전에는 그 해에 발족 된 수원시 소상공인 연합회에 가입을 했고 홍보이사로 소상공인들을 위한 대외협력과 홍보에 힘쓰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소상공인들을 위한 제도나 정책이 미흡한 점을 지적, 보다 많은 소상공인 들이 모여 소상공인 단체를 굳건히 마련해서 그들의 입지와 정책을 마음껏 펼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인성 ‘소담소담’ 카페 대표는 인생의 여정에서 상인으로서의 ‘질곡’이 누구보다 다양했다고 느껴지며 우리 서민들의 삶에서 ‘아픔과 기쁨’의 농도를 수채화처럼 겪어온 인물로 보였다.

때로는 극심한 시련을 통해서 지독한 아픔도 느꼈지만 끝내 좌절하지 않고 시 낭송을 통해 아름답고 훌륭하게 극복의 방법도 터득했고 그 인내의 결실을 힘들어하는 이웃과 함께 나누어 나가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강인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좌우명을 묻는 필자의 질문엔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늘 자신을 지탱하게 해준 “희망찬 도전은 행복하고 기쁜 일이다”라고 소신 있게 말했다.
생각이란 무릇 그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일컫는 말이다. 정인성 ‘소담소담’카페 대표는 천성이 낙천적인 타입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고 겪을 삶의 무게를 보다 도전적이며 적극적으로 풀어가는 그의 스타일에서 수원시 소상공인들의 희망이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필자는 희망찬 도전과 아름다운 시낭송을 통해 수원시의 소상공인 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행복한 삶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 낭송’같은 인터뷰를 마쳤다.

잘 쓰여 진 한편의 오페라 대본을 듣고 나오는 기분이다. 저물어가는 오후가 즐거웠다.

저작권자 © 새수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