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상생법 제정 이끌어 전통시장 권익 보호 앞장

 

최극렬 수원시상인연합회 회장
최극렬 수원시상인연합회 회장

 

카드수수료 2%대로 인하 ‘빛나는 성과’
전국 시장상인 위한 미소금융 지원 견인
삼성홈플러스 지분 테슬러에 매각유도 성공
대학 겸임교수로 강의…전통시장 학과설립 꿈

사무실의 분위기가 중국의 옛 황실 같은 분위기다. 벽에는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런 작품의 대형액자들이 더욱더 웅장한 스케일을 느끼게 한다.
마치 북방대륙의 거칠고 웅장한 집안에 들어온 느낌도 들었다. 이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의 모습이 마치 도인의 모습을 넘어 ‘징기스칸’을 연상시킨다.

날카로운 눈매와 하얗고 길게 자란 턱수염이 마치 삼국지에서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노익장을 과시한 장수 ‘황충’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세계의 절반을 들었다 놨다했던 ‘징기스칸’의 모습으로 오버랩 되기도 한다. 묘하게 잘생긴, 그래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다. 이 시대에서 보기 드문‘기인’이란 느낌이 강하게 밀려드는 순간이다.

수많은 인터뷰를 해왔지만 최극렬 회장의 포스는 남다르다 못해 너무 강렬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예사 인물은 아니라는 직감이 본능적으로 다가오며 흥미로운 인터뷰가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은 수원 토박이다. 수원에서 초·중·고(수원고)를 졸업하고 늦게 아버지의 뜻으로 83년에 단대 상대에 들어갔다. 85년도에는 경찰이 대학에서 철수하고 ‘직선제 상대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외적으로는 군부독재 타도, 내적으로는 학내 민주화를 주도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수원에서 시장상인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열악한 재래시장들의 단합과 상가 발전을 위해 노력을 했다고 했다. 당시에는 상인들의 모임이라는 게 친목회 정도의 수준이어서 단합과 소통의 어려움과 일관되게 한 목소리를 내기가 무척 어려운 시기였다고 했다.

이에 재래시장발전과 상인들의 단합에 대해 아쉬움과 시급함을 절실히 느낀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은 2004~2005년 노무현 정부 때 시장상인들을 위해 재래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해 애쓴 결과 특별법이 만들어졌고 동시에 수원시, 경기도와 전국에 재래시장상인들의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최극렬 수원시상인연합회회장은 2006년 첫 번 째 치러진 전국상인회장선거에서 1표차로 대전 대표에게 석패했지만 채 2년이 지나기 전에 전국회장이 문제가 생겨 사임하면서 전국상인회장직이 공석이 되어 실시한 보궐선거에 당선, 2~3회 연속, 회장직을 역임하던 중 임기 1년을 남기고 정부에서 대전의 전국상인회장사무실에 압수수색이 들어와 그에 책임을 지고 전국상인회장직을 내려놓았다.

당시에 ‘민노당 참여연대, 경실련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반정부적인 성격을 띤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지만 점차 정략적인 면을 풍기는 정치권의 정당들과 거리를 두었지만 정부의 압력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고 했다.  압수수색 이후 급기야 추가지원금이 끊겨버리는 상황까지 도래했다고 했다.

최극렬 회장은 당시 대전에 있던 400평 규모의 전국상인회사무실을 반으로 줄여 여의도에 서울 사무실을 개설, 전국 상인들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 때는 MB(이명박 대통령의 영어이름약자)와 회의 때 만나서 시장상인들의 권리와 지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압수수색에도 비리나 부정이 발견되지 않았고 MB는 회의에서 다시 만나 전국상인들을 위한 미소금융을 지원 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서민들을 위한 지원책인 ‘미소금융’을 발족시킨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미소금융’은 서민들을 지원하는 대출금이며 자본금은 예금주들이 잔고의 기억을 잃어버려 통장에서 잠자고 있는 ‘휴면예금’ 7000억 원과 대기업에서 5000억 원의 출연금을 받아 1조 2천억 원으로 시작한 서민구제 금융이었던 것이다. 또한 대표적으로 시장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온누리 상품권’의 발행은 전국 영세 상인들의 숨통을 튀어준 걸작이라고 할만하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재래시장 현안 안건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만나 지회장들과 건의할 때 카드 수수료 문제가 붉어져 대기업은 2%대 , 재래시장, 소상공인, 자영업자 3%~4.5%대 카드사가 수수료 명목으로 너무 많이 받아서 힘들다 라고 건의할 때 카드사가 문제가 있다 하면서 재래시장 카드 회사를 하나 만듭시다 라고 참석한 차관에 방법을 찾아보라 하던 모습이 물론 실행은 되지 않았지만 대통령보다는 어떻게 하든 도와주려는 동네 형님 같은 친근한 모습이 생생히 느꼈다 했다.

그 후로 비씨카드사 회사 대표와 협상으로 카드수수료를 2%대로 전통시장만 우선 시험 적용으로 인하한 조치는 직접적으로 상인에게 도움이 되었다한다.
이어 ‘카드수수료 인하’와 기타 전국상인들을 위한 여러 가지 지원책을 마련했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이 생각하는 최고의 걸작은 대·중·소상인들의 상생협력에 관한 ‘유통·상생발전법‘ 제정된 것을 최고의 작품이며 업적으로 생각한다고 하며 재래시장 명칭이 전통시장으로 바뀐 것은 MB 정부 때라고 했다.

순간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지그시 눈을 감기도 했다. ‘유통법’(유통산업발전법)과 ‘상생법’(대중소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을 합친 ‘유통상생법’은 대기업(대형상권)과의 마찰로 피해를 보게 될 재래시장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며 전국의 재래시장상인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목숨과도 같은 필수적인 법이라고 했다.

 이법은 ‘유통법’과 ‘상생법’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관계로 통합처리를 주장하는 민주당과 분리처리를 주장하는 한나라당을 오가며 정책위 의장을 만나는 등 무진 애를 썼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국상인들의 권익을 위해 밤낮으로 분주하게 움직일 때 중소기업청이 5개월 정도 지원금을 끊어 재정이 악화됐고 급기야 사무실을 폐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은 결국 사비를 들여 사무실을 유지하며 ‘고군분투’를 하고 있을 때 ‘중소기업청’에서 연락이 와 도움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한미FTA’조약이 추진되는 시기였고 조약내용이 국내의 영세 상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생각에 최극렬 회장은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조약이 체결되어 아쉬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성 홈플러스가 국내 시장에서 대기업의 유명세를 이용해 17%의 지분으로 소수의 배당을 받는 대가로 엄청난 매출이익의 대부분을 영국회사 ‘테슬러’에게 넘기는 것을 인지하고 결국은 삼성의 항복을 받아 2년 동안 삼성 지분 17%를 모두 테슬러에 매각하고 ‘삼성홈플러스‘란 상호에서 ’삼성‘자를 떼어놓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삼성은 약속을 지켰다고 했다.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은 겸임교수(경영햑박사)로 단대에서 3년간 강의했고, 상인학과를 만들기 위해 글로버사이버대학교로 이적해서 30년 장사한 상인들이 시장특성화 교수로 강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 배움에서 멀어졌던 모든 상인이 대학을 졸업해서 변화하는 유통환경에 적응해야 우리가 산다는 생각에 겸임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시장상인이 장사는 수십년 동안 잘해왔지만 말보다는 이론적으로 적립이 안되 있어 천한 직업이라 느끼는 시장상인이 무시 받지 말고 존경받는 상인으로 거듭나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시장으로 젊은 상인 육성에 최선을 다해서 대를 이어 갈 수 있는 시장을 만들고자 하는 모토아래 반값 등록금으로 지금까지 상인들은 졸업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통시장 학과는 만들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최극렬 회장은 GATT에는 ‘유통상생법’이 있었고 그래서 대기업(대형 쇼핑몰이나 유통)은 재래시장과 거리제한을 두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당시 영국에서 법을 공부한 친동생의 도움으로 GATT에도 예외규정으로 명시된 힘있는 선진국은 다 실시하고 있는 ‘자국보호 기본법’의 예를 들며 정부에서는 수출해서 먹고사는 나라인데 규제법은 안된다는 논리였다.

대형마트가 내세우는 국제변호사와 치열하게 다툰 결과 정부가 인정을 하게 된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결국 우리나라 행정부가 인정하고 입법부가 ‘대형마트 규제법’을 만들었고 했다.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은 국내·외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진출로 전국의 재래상인들이 고사위기에 몰리자 3㎞이내에 기존 상권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호받는 ‘상생법’을 제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경실련’ ‘참여연대’, ‘민노당’ , `한나라당`, `민주당` 등이 함께 힘을 보태 주었다고 고마워하기도 했다.

한편 수원역에 ‘롯데몰’과 ‘AK플라자’ 입점 시 2~3년 동안의 투쟁을 거쳐 수원전통시장상인들을 위해 롯데120억과 애경45억의 직접 배상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대기업도 지방자치의 본뜻을 지키기 위해 대형마트가 서울법인을 내서 지방세를 내지 않아 지역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수원에서 돈을 벌었으면 수원에 세금을 내야된다는 논리를 세워 수원에 별도 법인을 설립하게 해, 년 간 10억 원 이상의 세금을 창출, 수원시 세수에 큰 도움을 주게 하기도 한 것이다.

롯데는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수원에 법인을 내고 약속을 지켰고 염태영 시장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당연히 재래시장이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 적지 않은 명분을 마련하기도 한 것이다. 이어 화서역 주변, ‘연초제조창’자리에 들어설 ‘스타필드’에게도 현지 법인설립을 요구해 수원시 세수에 도움을 주게 할 계획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은 수원역에 입점한 롯데몰과 AK플라자 입점 시 상인들의 피해액 산출에 관해 용역을 통해 최소 380억에서 최대 500억에 이른다는 결과를 제시했고 롯데 측은 자체 조사 결과, 주변에 피해가 거의 없다고 주장하던 상태에서 철저한 이론과 자료를 통해 관철시킨 전문적인 뚝심의 사나이기도 했다.

당시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은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수원 22개 시장상인이 모두 문을 닫고 집회를 했고 22개 시장회장들 모두 수원역에서 단식투쟁을 하던 중 본인은 의식을 잃으며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사태 속에 2006년 당시 1830개이던 전통시장이 대형마트 입점으로 지금은 430개가 사라져 1400개만 남았고 조만간 전문가들은 1000개에서 적게는 700개 까지 줄어 들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지만 최회장은 지금의 시장이 모두 살아야 한다 라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했다.

이에 최극렬 회장은 전국의 전통시장이 살아남기 위해선 논리적인 명분과 철저한 전문지식 등이 필수적이라고 하며 대기업 진출로 어려워지는 시장에 살길은 정부, 지자체, 시민의 도움 없이는 시장이 어렵다는 논리다.  

최극렬 수원시 상인연합회장이 전국상인회장에서 임기 1년을 남기고 하차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름의 아픔이 있었다고 했다. 상인들을 위한 ‘유통법’과 ‘상생법’을 재정할 당시 ‘유통상생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전국에서 상인이 상경해서 집회를 하고 회장단은 여의도 중소기업 본부에서 단식투쟁을 벌임과 동시에 상인들이 모두 국회 앞에서 드러누웠고 이를 언론들이 기사화하기에 바빴었다고 했다.

동시에 서울에서 제주도를 몇 번이나 왕복하며 대형마트 규제법 법안통과 투쟁을 극렬하게 진행을 했었고 정부에서는 집시법으로 구속하려 했지만 시장생존권 투쟁으로 인지하여 구속하지 않았고 당시 여야 경제위는 모두 통과시켜 주었고 법사위에서 다수 반대를 하여서 법사위에 있었던 박영선 의원과 박지원 의원이 ‘유통상생법’ 통과에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하였고, 총회의 상정에서 여야국회의원들이 모두 통과를 시켜 주어 고마웠다고 했다.

최극렬 수원시상인연합회장은 대학 졸업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지동시장에서 아버님을 도와 지동시장 ‘태광축산’이란 상가에서 상인생활을 시작했는데 7년 정도 지난 후 가계에 압수수색이 들어오는 등 정부의 감시가 이어지고 있었다고 했다. 이때 아버님은 자신에게 “네가 아니라도 나라를 구할 사람은 많으니 너는 집안을 구하라”하신 말씀은 내가 다칠까봐 걱정하면서 하신말씀으로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최극렬 수원시상인연합회장은 2004년 지동상인회장을 시작으로 4월엔 수원시상인회장직을 취임했고 이어 다음 해 8월에는 경기도상인회장직을 거쳐 제2~3회 전국상인회장직을 역임하며 전국상인들을 위해 누구도 이룩하지 못할 엄청난 일을 진행했던 것이다. 최극렬 회장은 당시 자신이 그동안 ‘유통·상생법’, ‘미소금융’, ‘온누리 상품권’ 등 전국상인들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전국회장직과 경기도 상인회장직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이어 수원시상인회장직도 내려놓으려고 했으나 수원시 원로들이 수원만이라도 지켜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어 결국 오늘 날 까지 수원시상인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각 정당마다 비례대표제의 등 거듭되는 정치권의 출마권유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모두 일축해 버렸다고 하며 자신이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벌써 했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국가를 구하기보다는 집안을 구하라”는 아버님의 가르침도 있었고 자신은 뼛속까지 상인이라 지금이 좋다고 말했다.
수년 전에는 정치권에서 최극렬 회장에게 수원시장의 당선가능성을 매우 높게 평가, 강력하게 출마를 권유를 했지만 끝내 고사를 했던 것으로 세간에 전해지고 있다.
최극렬 회장도 한때는 여야정치권이 도와주지 않자 우리가 법을 만들자는 취지로 상인들을 위한 당(상인당)을 만들어  후보를 내세워 정치제도권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상인들이 정치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여·야(진보·보수)양 쪽에서 모두 공격을 받고 정권의 지원은 없고 상인의 순수한 색깔이 흐려지는 것을 염려해 그만 두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3시간 가까운 긴 인터뷰를 마쳐갈 즈음 끝으로 인생의 ‘좌우명’을 묻는 질문엔 “매순간 최선을 다하자”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이유를 묻자, 군 복무당시 전두환 사단장으로 있을 때 지뢰매설은 공병대가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보초를 서고 있는 보병이 해야 하는 상부 지시로 최전방 GOP 철책 험지에서 근무할 당시 지뢰 5000발 매설 작업을 우리부대 모든 병들이 작업했다. 마지막으로 흔적 인멸 작업을 할 때 시범을 보인다며 소대장과 선임하사가 나섰고 본인이 작업한 지뢰를 밟아 선임하사가 폭풍지뢰로 다리가 잘렸고 소대장은 대인지뢰를 밟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인생의 속절없음과 허망함을 느껴 많은 시간을 괴로워했다고 했다.

인간의 생이란 게 바로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울 진대 후회 없이 살기위해선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철책근무 당시 철책에 다가오는 민간인(거동수상자)을 잡아 전두환 사단장 표창을 직접 받고 포상휴가를 다녀오기도 했으나 사살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부대는 움직이는 물체는 무조건 사살하라는 정신교육과 사격훈련을 받으면서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이라는 것을 느끼며 자괴감으로 힘들었다고 했다.

최극렬 수원시상인연합회장의 웅장한 책상 앞에 놓여있는 커다란 초에도 “매순간 최선을 다하자”란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있던 것도 그의 ‘좌우명’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좌우명처럼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치열하게 살아 온 인물이었다.

그의 좌우명은 어찌 보면 위기의 순간마다 목숨을 담보로 치열하게 살아온 난세의 영웅인 ‘징기스칸’의 삶과 비슷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극렬 수원시상인연합회장의 모습도 ‘징기스칸’을 닮은 듯하며 ‘칸’이 묘사된 강렬한 대형 액자가 그 분위기를 완성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참으로 그릇이 크고 현명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치권으로 진출해도 큰일을 할 인물인데 자기 자신의 소신과 주관이 뚜렷한 인물이었다. 장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자신에 대한 그의 표현이 자꾸 귀에서 맴돈다.

“나는 뼛속까지 상인입니다”. 그런데 정부, 지자체, 시민의 도움으로 시장이 명맥을 유지합니다.
시장은 사람으로 치면 실핏줄 같아서 대기업 유통회사가 매입하는 국내물품을 보면 대규모 농,수,축산물 아니면 판매가 안된다. 판매가 안되는 소규모 농,수,축산물은 시장에 들어와서 농촌, 어촌, 산촌과 경제선순환 연결고리로 시장유통구조를 유지하면서 생계를 이어간다고 했다.

만일 시장이 없어지면 대기업 유통 마음대로 가격을 책정하는 유럽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농촌, 어촌, 산촌이 어려워지면 그만큼 국가가 책임져야 할 국민의 최저생계비가 많아진다. 중요한 경제논리를 우리 모두는 잊고 있다고 했다.

보기 드물게 묘하게 잘생긴 멋진 인물이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을 그는 수원의 ‘징기스칸’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수원시 전통시장이 왜 전국에서 가장 탄탄한가하는 의문이 저절로 풀리는 인터뷰였다. 최극렬 회장은 끝으로 “시민여러분 전통시장을 많이 사랑해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수원의 시장은 정조 대왕께서 수원화성을 축조하며 성 밖에 백성들을 위해 시장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일제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상인들이 대를 이어 시장을 유지해온 223년이나 된 전통 깊은 시장임을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풍운의 한 시대를 견뎌온 커다란 인물의 인생에 대한 질곡을 다룬 ‘대 서사시’같은 인터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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