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에 어느 고수가 이런 말을 실었다. “약한 자는 복수를 하고, 강한 자는 용서를 한다. 그리고 현명한 자는 무시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이면 쉽겠지만, 필자 같은 하수 입장에선 머리가 좀 복잡해지는 문구다.
복수도 힘과 집념이 있어야 한다. 격투기 경기에서 흔히 벌어지는 복수전 소위 리벤지도 그 만큼 강해야 리턴 매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약자는 복수한다는 표현보다 복수밖에는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가 아닌가 싶다. 강자는 용서를 한다고 했다. 그 말에는 동의를 한다.
 어느 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생각났다.“용서도 힘 있는 넘이 하는 거야 이 쉽세리야” 집단 구타를 당해 처참하게 일그러진 주인공의 쪽팔리는 면상을 내려 보며 악당이 한 대사였다. 그래서 그 순간 악당이 멋있게 보였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 용서는 강자가 하는 것이지 약자는 용서가 아닌 포기가 될 것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한다고 해도 용서는 관용일 뿐이다. 약자가 하는 용서는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어울리지도 않고 이해도 어렵다. 푸념 같은 구시렁구시렁 거리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자는 무관심을 택한다고 했다.  의미로 본다면 이미 초월을 한 사람의 행동으로 보인다.  아니면 정말 그 정도의 힘이나 배경이나 인격적 통달이 상대에게 커다란 데미지나 피해를 입었어도 무관심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계를 살짝 벗어나 신계의 초입에 있어야 가능하지 않나 싶다. 아니면 복수마저도 귀찮게 느껴지는 내공에 도달 한 걸까?
암튼 필자 같은 속물들의 입장에선 용서만도 어마어마한 수양이 쌓여야 하는 데 무관심은 아마 죽기 전까진 갖추기 어려운 선택일 것이다.
토굴 앞에서 햇볕을 가리고 서있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꺼지라고 일갈한 디오게네스 정도가 아니라면 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 보면 약자가 행하는 복수가 제일 인간미가 풍긴다고 볼 수도 있다. 그 복수라는 것이 또 다른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처절하지 않다면 어느 정도의 복수가 인간사회를 위한 필요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왼뺨을 얻어맞고 또 오른 뺨까지 내줄 정도의 도량은 갖추기도 어렵고 오른 뺨 대신 딱 밤이라도 한 대 치고 돌아서는 게 아마 전쟁과 지옥 같은 신(쩐)자유주의 우선의 이사회를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야당이 된 정치인들이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이라 몰아붙이며 주둥이에 거품을 물고 있다. 보복은 곧 복수란 의미와 유사하다. 문재인 정부가 약자라서 복수하는 게 아니라면 이건 당연히 정치기강과 사회정의를 바로잡는 정책의 실현일 뿐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자와 정부는 옳고 그름의 귀감을 세움이 당연한 의무이며 치세의 기초다. 정치판도 인간계이기 때문에 인간스럽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다소 강하고 거칠게 느껴지더라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바로잡고 가야한다. 현세대를 사는 우리는 후손들에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 글을 쓰면서 늘 느끼는 감정이 있다. 나는 가끔씩 속물과 얼치기 현인 사이를 오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인간답고 나답다고 느낀다.  많이 망가진 인생을 살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꼬락서니로 살 것 같다. 생긴 대로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다운 것 같다. 추워도 積弊淸算(적폐청산)은 해야 한다.  그게 경우가 있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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