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의 이름 없는 공장, 이름 없는 소년공에서 인권변호사, 성남시장, 경기도 지사까지 그리고…

 

우선 인간 이재명을 들여다 보고 싶다. 가난은 나랏 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재명은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청량산 자락 ‘지동마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제들은 5남 4녀가 있었지만 누나 둘이 어려서 세상을 떠나 5남 2녀로 성장하였다.
성남으로 오게 된 동기는 이재명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을 나간 아버지가 1976년에 성남에서 가족을 불려 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아버지의 형편으로 형제들은 모두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처지였고 소년인 이재명 역시 아버지를 도와 쓰레기를 치우거나 고물을 줍는 등 청소일을 도우며 생활해야 했다.
성남에서 생계를 위해 공장에 다닐 때도 너무 어려 자신을 숨기고 타인의 이름으로 공장을 다니는 소년공생활을 하며 가정 일을 도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소년 이재명은 또래의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것을 제일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일 검정고시 패스 후 중앙대학교 입학식 날 교복에 대한 한이 커서인지 일본풍이 남아있는 교복을 맞춰 입고 어머님과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가 소년시절 수없이 겪었던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갈등은 극심한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후일 이재명을 좀 더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이재명은 당시 열악하고 조악했던 공장의 근로환경 속에서 왼팔의 인대가 끊어지고 손목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배움과 진학에 대한 갈망으로 공장을 계속 다닐 수밖에 없었고 결국 불구가 되는 치명적 신체 결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재명은 오히려 굽은 팔로 인해 군대 면제를 받게 되며 그 사실에 대해 공부할 시간을 남들보다 더 가졌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기도 해 일견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면도 간직하고 있지 않나 싶다.
한편 이재명은 소년시절 가난한 가정형편 탓에 공장근로로 인해 정규교육인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었기에 할 수없이 검정고시로 정규교육 6년 과정을 1년 3개월에 마치는 천재성과 엄청난 집념을 보여주기도 했다.
비록 시험위주의 공부방식이라고 해도 웬만한 노력과 머리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를 패스한 이재명은 그간 우리나라에서 대입시험으로 치러지던 예비고사 대신 최초로 내신을 중시하며 치러진 학력고사에서 285점이란 상위 그룹의 점수를 받았으나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장학금을 택해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
법학과에 입학한 이재명은 법학개론과 철학개론 등의 수강과정에서 한자나 기타 법률용어 등의 기초지식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시험공부방법을 전혀 몰랐던 탓에 중간고사를 완전히 망치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는 검정고시 등 그가 여태까지 치러온 모든 시험이 객관식이었고 거기에 철저하게 익숙해진 탓에 거의 주관식위주인 대학시험에선 답을 알고 있었지만 효과적으로 답안지를 작성하는 법을 몰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해서 한자와 법률용어 등의 기초지식부터 쌓기 위해 헌책들을 구입해 더욱더 치열하게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재명은 사춘기를 거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이성에 대해 소극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소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캠퍼스학창시절은 소년공 시절을 같이 겪고 같은 대학에 입학한 불알친구와 주로 어울렸고 삼등 열차를 타고 강원도로 떠난 여행이 최초였다고 한다.
또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고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낚시를 좋아하기도 했으며 어린 소년공시절 오리엔트라는 시계공장에 다니며 시계에 익숙해진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시계를 무척 중시하며 아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간의 소중함도 함께 터득했다고 했다.
이재명은 과일을 몹시 좋아한다고 했으나 어린 시절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주로 아버지가 쓰레기더미 속에서 주워온 과일들을 먹으며 자랐다고 했다.
새벽에 청소부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할 당시 아버지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썩은 토마토를 찾아내 먹는 걸 보고 심한 역겨움과 자괴감을 느끼며 괴로워했던 적을 술회하기도 해 그 당시 어린 소년의 가슴에 가난이라는 벗어 날 수 없는 굴레 속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는 그렇게 치열하고 힘든 가난 속에 배운 돈에 대한 귀중함을 알고 후일 절약정신이 몸에 배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소년공 시절 당시, 이재명은 교통비가 아까워 2십리 길을 옆집 가듯 걸어 다녔다고 한다.  대학생 이재명은 사법고시에 꿈을 두고 열심히 공부해 2차 시험에서 한번은 낙방하나 다시 도전해 결국 사법고시에 합격하게 되고 탄탄한 앞길을 보장받기도 한다. 이재명이 사법고시에 합격할 때 쯤 아버님이 위암으로 촌각을 다투던 시기였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 사법고시 합격통지서를 아버님에게 보여드렸을 때 아버님이 짓던 희미한 미소를 못내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재명은 한 가족을 이끄는 가장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당시 아버지가 짊어졌던 그 어마어마한 삶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몹시 그리워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당시 대학을 중퇴한 인텔리였지만 사업의 실패로 방황을 했고 가정이 어려워졌지만 도망치지 않고 현실과 정면으로 맞선 책임감 강한 아버지라고 술회하며 자기가 아는 아버지는 한 번도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사춘기 어린 시절 가난하고 열악한 가정환경 속에서 방황하던 이재명은 아버지와의 갈등이 죽음만큼이나 힘들고 싫었었다고 했다. 그래서 가난한 현실과 아버지에 대한 극심한 증오감으로 인해 기도한 자살이 두 번이나 실패를 했고 나중 생각해보니 죽고 싶어 죽기보다는 이렇게 살기 싫다는 무의식이 아니었겠느냐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숙명처럼 미워했던 아버지였지만 훗날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치열하게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 시대의 힘들고 고달픈 가장이었음을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철없던 시절 아버지께 품었던 모든 원망과 불만이 자신의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우리자식들에게 그토록 절실하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하셨던 것은 현재와 미래의 균형이 아니었을 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건 소년 이재명이 검정고시를 보든 대학에 가든 미래에 대한 과장되고 헛된 꿈으로 인해 현실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교훈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사람들은 그를 ‘개룡’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이재명을 만든건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따끔한 가르침 덕이라고 말했다. 이재명은 아버지에 대한 먹먹한 그리움으로 흔히 얘기하는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은 효도하고자하나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는 말을 표현했던 것을 상기하면 인간 이재명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로 늘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늘 어린 이재명을 한 결 같이 보듬어 주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다시 한 번 먹먹해져가는 모습을 상상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재명은 사법연수원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냈지만 흔히 출세가 보장된 판검사의 길보다 본인이 어렸을 적 소년공시절 겪었던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앞날이 불투명한 ‘인권 변호사’의 길을 택한 것을 지금까지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시절 사법고시 합격이란 타이틀로 인한 신분상승에 기인해 보게 된 맞선에서 한 여인은 이재명지사가 출세가 보장되고 앞날이 창창해질 판·검사를 마다하고 인권변호사를 택한다고 한 이재명을 정상적인 사고의 소유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떠나 버렸다고 씁쓰레 표현한 적도 있다. 그리고 후일 만난 지금의 아내는 자신의 정의롭지만 당시론 비현실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을 역설하는 이재명을 열변을 끝까지 차분하고 진지하게 경청해 주었다며 무척 고마워하며 또한 미안해했다. 그는 성남을 사랑했고 성남을 아꼈으며 성남을 떠나지 않고 그 곳에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 성남시장에 당선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인 안동 지동마을과 성남을 제2의 고향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성남시장 재임 시 어릴 적 성장기에 배운 돈의 소중함을 알고 지독하게 아끼며 철저하게 사용용도를 파악하는 습관 덕으로 성남시의 재정을 효율적으로 활용, 만성적인 빛을 모두 탕감했다고 했다.
그리고 전국 최초로 성남시 청년배당을 실시했을 때 한 청년이 이재명 시장에게 청년배당으로 과일을 사서 원 없이 실컷 먹을 수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린 시절 쓰레기 더미 안에서 주운과일로 배를 채우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울컥하며 보람을 느꼈다고 도 했다.  성남을 사랑하고 아꼈던 이재명시장은 더 큰 꿈을 꾸며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 사랑하던 성남을 떠나 경기도지사에 도전했고 그 치열하고 험난했던 당내 경선을 통과해 본선에서 압도적으로 당선이 되는 쾌거를 이룩하게 된다.  하지만 당선 후 곧바로 그를 기다린 건 선거당시 불거졌던 네거티브성격의 사건들이었고 지리한 법정 다툼의 진행이 앞을 막았다.

정치인 이재명의 험로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올해 1월 초부터 4개의 혐의를 받고 재판 중이었다. 첫 번째 혐의는 친형을 강제 입원시킨 사건으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와 공직선거법위반혐의다. 둘째 혐의는 대장동 개발업적 과장 건으로 공직선거법위반혐의다. 세 번째는 검사사칭 건으로 이 역시 공직선거법 위반혐의다.
하지만 지난 16일 열린 1심 재판부 공판에선 4가지 혐의 모두를 무죄라고 선고했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1부(최창훈 부장판사)는 선거범죄와 다른 죄에 대해서는 분리 선고하도록 규정한 공직선거법에 따라 직권남용혐의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따로 선고를 했던 것이다. 이날 열린 공판에서 친형의 강제입원사건의 직권남용 혐의는 일반적 권한영역의 직권행사로 터무니없다고 볼 수 없다는 게 무죄 판결의 취지이다. 이어 친형 강제입원, 검사사칭, 대장동 개발 업적과장사건 등의 3개사건에 관련한 공직선거법혐의에 대해서도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대장동개발업적 과장사건은 당시 이지사가 다소 과장된 표현을 했을 지라도 허위라는 판단 하에서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유권자를 현혹 시킬 의도로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어진 검사 사칭 사건에 대해서는 이지사가 “억울하다”고 표현한 것은 구체성이 없는 평가적 발언에 가까워 그 자체로는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있는 사실이 없다고 판단했다.
1심재판부의 무죄선고로 이 지사는 좀 더 탄력을 받고 도정에 매진할 수 있게 됐다. 이 사건은 지난 해 6·13 지방선거 당시 남경필전지사와 자웅을 겨뤘고 56%대 35%의 득표율의 압도적인 표차로 경기도 지사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 지사는 당시 당내 후보경선과 본선의 선거과정에서 불거진 여러 의혹들로 곤혹을 치루며 급기야는 경찰수사로 진행되었다.
이 지사는 당선초기부터 재판에 시달리며 민선 7기의 지사직을 수행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일관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검찰과 맞서 1심 공판에서 당당하게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지사는 무죄선고를 판결한 재판부에 대해서 “사법부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재판부에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며 판결에 대해 매우 만족하기도 했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이지사는 “큰길을 가겠다”는 포부와 의지를 보이는 동시에 명예회복에도 성공한 것이다.
이지사는 이 사건으로 20여 차례의 재판이 진행됐고 그간 55명의 증인이 출석하며 검찰과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여왔었다.
한편 어린 시절의 가난과 부상 등 소년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수없이 맞닥뜨렸던 이지사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 셈이다. 경기도지사후보 민주당내 경선 당시에도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던 ‘3철(양정철, 이호철, 전해철)’ 중 당내 조직력이 가장 탄탄한 전해철의원과의 경쟁에서도 예상을 뒤엎고 큰 차이로 후보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는 역경과 고난에 맞닥뜨릴 때 마다 “씨앗은 어둠속에서 싹을 틔운다.“는 어렸을 적의 고난 기를 상기하며 헤쳐 나갔었던 것 같다. 이재명지사로서는 이 시기가 정치인의 길로 접어든 시기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긴 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직 검찰의 항소의견으로 이 사건을 완전하게 매듭짓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큰 산을 넘은 셈이고 그래서 큰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간 5개월 여동안의 지리 한 재판기간과 극심한 스트레스가 도정의 공백을 불러올까도 우려 됐었지만 세계 최초 기본소득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성황리에 개최하는 등 무난하게 지사직을 수행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렇게 험난한 산을 넘은 이재명 지사의 의지는 어디까지 인지는 모르나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이재명 지사의 길은 ‘큰길’이라고 한다.

큰 산을 넘은 정치인 이재명의 향후 행보

일단 사람이 갖은 고초를 겪으며 큰 산을 넘으면 눈앞에 넓은 평야가 펼쳐지게 마련인 것이다. 이재명지사주위로 인재와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벌써 여권 쪽에서 道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여러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문재인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이상을 공유하던 이들이 경기도 정책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도는 지난 대선당시 문재인 캠프에서 SNS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았고 문재인 정부 출범 후에는 2년 동안 청와대 소통을 총괄했던 윤영찬 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을 철도정책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이와 함께 이지사는 민주당을 향해서도 “큰 길을 함께 가자”는 권유와 정부와 당의 단합을 당부하며 문재인정부가 성공해야 하고 그게 우리가 모두가 가야 할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현 정국은 촛불정신이 흐려지고 청산해야 할 세력들이 다시 준동하고 있는 시점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의 분열과 대립, 그리고 갈등이 심해지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도는 문재인대통령의 대선 후보캠프에서 인재영입 등 큰 역할을 했던 정동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경기도가 야심차게 추진 중이며 9월로 예정된 DMZ평화페스티벌 조직위원회를 총괄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문재인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을 동시에 경기도가 품는 것은 현 정부와 민주당과의 원만한 관계내지는 효율적인 소통을 통해 그간 소원하거나 서먹했던 분위기를 해소하고 본격적인 정치적 외연확장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의견도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이어 경기도의 이재명호는 지난 22일 전국 지자체 최초로 민주노총과 노정교섭을 선언하기도 했다.  앞으로 펼쳐질 정치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정확한 예측이 어렵겠지만 험난한 정치적 고비를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며 대차게 넘긴 이재명지사는 소년공 10년의 일기 속에서 감내했던 처절한 가난과 암울한 환경, 그리고 신체적 고통과 불구를 이겨내는 강인한 극복정신을 감안해 본다면 경기도의 이재명호를 넘어 대한민국을 공정하며 정의롭고 행복하게 이끄는 훌륭하고 소박하며 강인한 대한민국호선장의 모습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김동초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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