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명예의 전당 인물사 / 수원화성의 이름을 되찾은 서지학자 故 이종학 <중편>

 

“충무공 사료를 통해 선조의 영토수호 의지를 깨달으면서 당장 현실 문제인 독도 영유권 쪽으로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이종학이 충무공에 이어 독도 관련 사료 수집에 뛰어든 이유다. 그는 임진왜란 사료를 살펴보며 한일외교관계와 영토 관련사료로 눈을 돌렸다.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독도, 한일강제합병 과정에서 잃어버린 간도와 녹둔도 등 우리 땅의 역사를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독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기 위한 이종학의 방식은 달랐다. ‘주장’이 아닌 ‘사료’에 근거하되, 일본이 만든 사료를 찾아내 우리 주장을 뒷받침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일본과의 역사 전쟁에서 이기려면 일본의 사료를 역이용해야 한다는 발상이었다.
이를 위해 이종학은 20여 년간 일본의 국립공문서간과 고문헌수집상을 50차례 이상 찾아갔다. 독도에 대한 자료라면 한걸음에 달려가는 이종학이 일본에 나타나면 ‘다케시마가 왔다.’고 모두 알아볼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오래된 고문서 속에서 찾아낸 독도 사료들은 일본인들의 주장이 억지였음을 입증했다. 일본이 임진왜란 중인 1592년 발행한 ‘팔도총도’에는 독도가 ‘우산도’로 명기돼 있다. 1883년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발행한 ‘환영수로지’제2권 제5편 조선동안(朝鮮東岸)부분에는 독도가 ‘리앙코루토 列岩‘으로 표기돼 있다. 위 자료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명명백백하게 인정한 대표적인 일본 지도들이다. 또 일본의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에 발간한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땅과 같은 색으로 표시해 두 섬이 조선 땅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종학은 독도 사료 외에 동해가 조선해임을 표기한 일본의 고지도 20여점을 찾아내 ‘동해를 방위 개념의 동해가 아니라 고유 명칭인 ‘조선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1854년 일본에서 목판으로 제작된 세계지도 ‘신정지구만국방도(新訂地球萬國方圖)’등에도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하고 있다. 1871년 일본에서 제작된 ‘동전지구만국방도(銅鐫地球萬國方圖)’등에도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일본뿐 아니라 서양의 지도, 고문서, 신문기사 등에서도 독도와 조선해 표기를 찾아냈다. 예를 들어, 1778년 프랑스가 제작한 지도에 따를면 조선과 일본 사이의 바다가 ‘Mer de Core(조선해)’로 표기돼 있다. 이들 자료는 1905년 2월 22일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 관할로 강제 편입하기 이전에 작성되어 일본의 억지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다. 또 일본이 국제법으로 문제없다고 주장하는 ‘시네마현 고시 제40호’가 법적인 ‘고시’가 아니라 관계들 몇몇의 ‘회람’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종학의 우리 영토에 관한 연구는 북방의 땅 녹둔도와 간도까지 향했다. 이름조차 낯선 녹둔도(鹿屯島)는 함경북도 선봉군 조산리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여의도의 약 두 배 크기 섬으로, 1860년9철종 11년) 청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 땅이 되어 영영 되찾지 못한 땅이다.        
이종학에 따르면 녹둔도는 1587년(선조 20년)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을 물리치고 지켜낸 우리 영토였다. 1860년 당시 일본 신문에서 한국이 녹둔도를 러시아에 빼앗긴 기사를 찾은 그는 ‘오늘날에도 녹둔도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제 땅을 빼앗기고도 기억조차 못 하는 것은 영토의식의 부재’라고 통탄했다.
이종학은 1909년(융희 3년) 일본이 청나라와 맺은 간도협약으로 중국 땅이 돼어버린 간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하는 숱한 사료를 수집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발행한 간도 지도에 간도를 지린성 관할로 행정구역을 표기한 것을 찾아냈는가 하면, 1924년 프랑스의 외방선교회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교구도’에 북간도가 원산교구 소속으로 표시돼 있어 한국 영토였음을 밝혔다.
이 밖에도 간도 지역의 산업, 생활, 역사를 담은 통감부 발행 ‘간도사업조사서’, ‘간도사진첩’과 함께 일제 강점기에 기자로 활동한 유광렬의 ‘간도소사’등을 발굴해 간도가 주인인 한국의 동의 없이 제국주의자들 뜻대로 주고받은 땅임을 입증했다.
이들 사료수집과 연구과정에서 이종학은 일제강제병합이 부당한 것임을 밝히는 일본의 극비문서를 발견하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당시 조선총독 테라우치가 기록한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이 그 문서이다. 이종학은 1992년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이 문서를 몰래 복사했고 1997년 7월 일본 고등재판소에서 열린 한일강제병합 무효소송에 이를 제출해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입증했다. 이어 일본의 비밀문서 ‘한일병합에 관한 서류-착전과 발전’, ‘추밀원 회의 필기-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외’도 입수·공개해 국내외에 한일 강제병합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화 성(華城) 제 이름을 찾다.

이종학은 화성의 제 이름을 찾아준 것을 비롯해 수원지역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발견한 향토사학자이기도 했다. 수원 화성 축성 200주년 이던 1996년, 이종학은 문화재관리국에 수원성을 ‘화성’으로 바로잡아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화성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화성성역의궤’를 실물크기로 영인해서 국내외 연구기관에 무료로 배포했다.
조선을 넘어 아시아 근대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수원 화성(華城)은 1789년 정조대왕이 당파싸움으로 인해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풍수지리상 명당자리로 꼽혔던 수원지역으로 옮긴 이후, 1790년 축성계획이 세워졌다.
1794년부터 축성이 시작되어 1796년 약 5.7㎞의 성곽이 완성되었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수원성이 아닌 본래 이름인 화성으로 등재하게 만든 주역이 이종학이다.
이종학이 영인 보급한 ‘화성성역의궤’는 정조 18년(1794) 1월부터 정조 20년(1796) 8월 까지 화성성곽의 축조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당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심사위원들은 이종학이 간행한 ‘화성성역의궤’ 영인본을 근거로 수원시에 복원한 화성이 옛 성곽 원형에 가깝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이에 힘입어 화성은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에 이어 한국에서 5번째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007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포함한 ‘조선왕조의궤’가 기록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수원시는 수원행궁복원 사업2단계로 2020년까지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우화관’을 복원 할 예정이다.
이종학은 화성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한발 더 나아갔다. 국내 학술연구기관들에 ‘화성’이라는 제 이름을 사용해 달라고 요청하고, 잘못된 명칭을 사용한‘수원성 200주년 축성 기념우표’의 판매금지를 요청하는 재판도 신청했다. 그는 화성 축성 200주년 및 화성행궁 복원을 기념하는 특별전 ‘정조대왕 및 충효자료전’을 개최한 후 전시 유물을 모두 수원시에 기증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수원성은 본래의 이름 화성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향인 수원군 우정면이 1919년 3·1운동의 역사적 현장이었음을 상세히 밝히는 사료도 발굴했다. 1919년 일본 육군성이 발행한 ‘조선소요경과개요’에 따르면, 1914년 4월 15일 일본군이 수원군(지금의 화성)향남연에서 교회당에 불을 질러 30여명을 몰살한 제암리 학살사건이 우발적이었다는 일본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앞의 자료에 따르면 제암리 학살사건은 일본이 마을 화수리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을 보복하고자 고의로 저지른 만행이었다. 이종학은 일본의 만행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화수리에 3·1독립운동 기념비를 건립했다. 사료를 발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픈 역사를 훗날에도 잊지 않자는 뜻에서 기념비까지 세운 것이다. 발췌요약 : 김동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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