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명예의 전당 인물사 / 수원화성의 이름을 되찾은 서지학자 故 이종학

 

이 종학: 1927년 10월 1일 수원군 우정면(현 화성시 우정읍)출생
         2002년 11월 23일 별세

“평생 남다른 사명감으로 고문서 발굴과 사료연구를 통해 역사를 바로세우고자 했던 이종학은 ‘역사를 김매기 하다’는 뜻의 자신의 호 ‘사운(史芸)’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에게 역사는 옥석을 가리고 이정표를 바로 세워 후손에게 옥토로 물려줘야 할 유산이었다. 그는 역사를 바로 잡는데 평생을 바쳤다. 이종학은 일제에 의해서 왜곡된 수원성의 본래이름 화성(華城)을 되찾고 화성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에 기여했으며, 수원시에 평생 수집한 귀중한 자료 2만여 점을 기증해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프로필 Profile

1955.                  서울종로5가 ‘권독서당’운영
1957.                  연세대 앞 고서점 ‘연세서림’ 운영
1976. 4.               명량대첩 「장계」 초록 발굴 공개
1980. 8.               1740년(숙종 16) 백두산정계비 문제 등을 다룬 「백두산 일기」 공개
1981. 2.               「조선동해안도」 발굴, 공개
1983. 4.               이순신장군이 왜군을 항복시킨 곳을 기념한 ‘수항루’ 사진공개
1985. 4.               수원시사 집필 및 편찬위원
1989.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3·1운동 유적지 기념비 건립
1993.                  경기도 편찬위원 및 감수위원
1998. 2.~2001. 2.      독도 박물관 초대 관장
1997. 9.               「한산도가(閑山島歌)」 공개
1999. 3.          극비문서 「추밀원회의 필기-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외」를 국내에 소개
1999. 12.~2000. 11.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초대 소장
1996.  5.~2002. 11.   사운연구소 소장. ‘화성‘관련자료 발간
2004. 1. 6.           수원시에 이종학 소장 자료 2만여 점 기증
2008. 10. 1.          수원박물관내 ‘사운 이종학사료관’ 개관
                      (2014. 3. 7. 수원광교박물관 ‘사운 이종학실’로 재편)
2012. 8. 14. 수원박물관. 10주기서거 특별전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계최


수상 Award

1986.                  독립기념관 건립추진 감사패
2003.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제3회 한림기록문화상 수상
2014                   동북아역사재단 주관 제5회 독도상 시상식 독도사랑상

기증 donation

1966.                  수원화성 축성200주년 기념 ‘정조대왕 및 충·효 자료전’ 개최 후                 
                            「궁원의」 등 400여점 접수 원시기증
2004. 1.           이종학 선생 사후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유족들이 자료 2만여 점  수원시 기증
1983~1997.      독립기념관 4.000여 점(전국 1호 기증자)
1995. 5.              동학혁명 백주년 기념관 400여점
1988~1997.       아산 현충사 900여점
1997~2001.       독도 박물관 1.300여점
2001. 3.               북한 사회과학원 2.000여 점


“역사가 천만년 누릴 정신의 오토라면, 지금 제대로 갈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사운(史芸) 이종학-

책 좋아한 청년, 연세서림 운영하며 고서에 빠져들다.

이종학은 1927년 10월 1일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주곡리 244번지에서 태어났다. 이종학이 태어난 곳은 지금의 화성시 우정읍으로 일제 강점기 3·1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또한 그가 오랫동안 기거했으며 연구실로도 썼던 자택은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종학은 수원과 화성 지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고자 하였다.
8세 때 아버지 이세기를 여읜 그는 할아버지 이병준과 어머니 김아기의 슬아에서 자랐다. 어릴 때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익혔고, 삼괴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삼괴고등공민학교에 다녔지만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다. 이종학은 해방이후 고등고시를 보기 위해 건국전문학교에서 잠시 법률공부를 했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중퇴하고 곧바로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한번 손에 잡은 책은 끝까지 읽고, 군 휴가 중에도 서점에 들러 책을 사볼 만큼 책을 좋아하던 그는 ‘책을 마음껏 읽고 싶다’는 일념으로 서점을 열었다고 한다. 서른 살 즈음인 1955년에는 연세대 앞 철길 근처에 고서점 ‘연세서림’을 연다.

충무공 이순신사료의 발굴 ‘이순신학자’ 가  되다.

이종학은 시간이 날대마다 인사동 고서점에 들러 부르는 대로 값을 쳐주며 고서를 수소문했다. 연세서점을 운영하던 1969년 어느 날 이종학은 한학자이자 고서수집가인 길곡 서인달(徐仁達. 1902~1990)을 만나 귀중한 서적들을 넘겨받는다.
한겨례신문 노형석기자에 따르면, 막대한 고서를 수집했던 서인달은 ‘값을 절대로 후려치지 않고 고서를 알아봐 주는 사운 이종학의 정성에 감복해 모든 사료를 고이 넘겼다고 한다.
이종학은 서인달의 사료 속에서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작고하기 2년 전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종학은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

“서인달 어른이 주신 책 가운데 이순신장군관련서적이 아주 많았어요.(중략) 신문지에 둘둘만 휘호를 펴보니 놀랍게도 이순신 장군의 「한신도가(閑山島)친필 원본이었어요. 필적을 확인해보니 진품이었고, 1597년 8월 보름에 읊은 기록이었어요. 나는 그때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장군의 정신에 감동해 충무공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이순신 관련 사료들과의 만남은 이종학을 국내 최고의 이순신 연구자로 바꿔놓았다. 사료 수집가에서 사료연구를 토대로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는 서지학자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는 이순신을 연구하기 위해 이순신이 초서체로 쓴 ‘난중일기(亂中日記)’초고본 사본을 구해 책이 닳을 정도로 읽었다. 국보 제76호인 ‘난중일기’친필 초고본은 충무공이 임진왜란 7년(1592~1598)을 기록한 진중일기로, 당시의 교전상황, 전쟁 중 일상과 국정판단 등이 날짜별로 기록돼 있다. 이 초고 본을 훗날 정조 시대에 정자로 판각한 책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이다. 유년시절 서당에 다니며 배운 한자실력만으로는 흘려 쓴 초서체를 더듬더듬 읽기도 어려웠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난중일기’초고본을 100번 넘게 읽으면서 초서체를 술술 읽어 내려갈 실력을 갖추고 훗날 ‘난중일기’오역까지 바로잡는 실력자가 되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왜군의 패악을 보며 그는 일제 강점기 보통학교에 다닐 때 겪은 일본 순사의 행패를 떠올렸다. 언론에 밝힌 이야기에 다르면 어리 적 순사가 찾아와서 가옥 청결조사를 한다는 이유로 툭하면 가족을 때리며 패악 질을 했다.
이종학은 ‘난중일기’를 보며 유년시절으 설움을 다시 떠올렸고, 이는 평생한일관계와 일제강점기를 치열하게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종학은 ‘난중일기’독해로 다져진 이순신연구를 토대로, 1976년 언론에 ‘이순신학자’로 등장했다. 그해 4월 29일자 조선일보문화면은 ‘충무공 연구에 새 사료’라는 제목 아래 이종학 사료의 중요성을 대서특필했다.

‘여태까지 학계에서 궁금하게 여겨오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장계(임금에게 서면으로 올리는 보고)내용과 임란당시의 거북선 척수를 밝혀주는 새로운 사료가 발굴됐다.’

기사에서 인용한 새 사료는 ‘사대문괘(事大文軌)’이다. ‘사대문궤’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선조25년)부터 1608년(광해군즉위)까지 16년 동안 조선과 명나라사이에 오간 외교 문서모음집이다. 선조가 명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 중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직후 올린 장계가 인용돼 있어 명량대첩 장소와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다.
‘사대문괴’에 인용된 명량대첩 장계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은 1597년(선조30년)9월 16일 벽파정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배 13척으로 일본군 130여척을 상대했다. 문학작품과 영화에서 흔히 알져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대사와 달리 이순신 장군이 12척이 아니라 13척의 배를 투입했다는 것도 이종학의 사료 연구 결과이다.
그는 1997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597년 음력 9월9일)명량해전 일주일 전)송여정장군이 전선 1척을 이끌고 합류한 만큼 배는 13척으로 늘어났다”며 한 척이 추가된 배경을 밝혔다.
거북선의 머리와 모양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몸통으로 들락날락하는 구조였음을 최초로 밝히기도 했다. 조선 말기의 학자 신석우의 시문집‘해장집(海藏集)’을 토대로 고증한 것이다. 아울러 거북선이 전함과 화물선 겸용임을 밝힌 이도 이종학이다. 이종학은 충무공이 그동안 알려진 해전의 명장일 뿐 아니라 탁월한 육상전투 지휘관임을 입증하는 ‘반곡집(盤谷集)’을 세상에 알렸다. ‘반곡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정경달(丁景達)의 일기·문집·서한이 묶여있는 시문집으로, 정경달은 1594년(선조27년)부터 1년간 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일하며 이순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이기에 사료의 신빙성이 크다.
이순신연구자 이종학은 책상머리 연구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길과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사료의 진위 여부를 현장에서 확인했다. 왜군이 충무공에게 항복한 곳으로 알려진 수항루(受降樓·항복을 받은 누각이란 뜻)사진을 일본의 옛 사진집에서 찾아내어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터를 복원하는 데도 공헌했다.
수항루는 1677년(숙종3년)에 세워진 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했으나 1907년 일제가 허물어 버린 누각이다.
1907년 일본에서 발행한 사진집 ‘한국화보’에는 ‘일본을 이긴 것을 기념하는 수항루’라는 제목과 함께 2층 누각형태의 사진이 실려있다. 사진 설명에는 ‘수항루는 통영시 해안에 있었는데,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근거지로서 이순신이 일본수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았다고 하며 ’受降樓‘라는 큰 현판을 달고서 지금까지도 한국 사람들이 크게 자랑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종학은 사진공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1988년 4월 1987년 통영시에 수항루 복원을 적극적으로 건의했으며 통영시는 사진을 토대로 1988년 4월 통제영터에 수항루를 복원했다. 기록으로만 전하던 역사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였다.
이종학의 이순신 연구는 제도권 학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뛰어난 한자 해석을 통해 당시 ‘난중일기’번역본이 오역투성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는가 하면, 충무공의 전사일이 일제 강점기 편찬된 자료집에 기록된 1598년 음력 11월 18일이 아니라 19일 임을 입증해 국사 교과서를 바로 잡기도 했다. 조선 중기 학자 고상안(1553~1623)의 ‘태촌선생문집(泰村先生文集)’을 뒤져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저자 고상안은 이순신의 과거급제 동기이자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순신을 만나 상세히 기록한 인물이다. 삼가현감을 지내던 고상안은 임진애란 중인 갑오년(1594년)에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무과시허을 실시할 때 참사관으로 참가하여 13일을 함께 지낸 이순신의 용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통제사는 과거시험에 같은 해 합격한 이로, 며칠을 같이 지냈는데 그 말의 논리와 지혜로움은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고 상(相)도 입술이 뒤집혀서 마음속으로 여기기를 ‘복장(福)은 아니구나.’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나국(拿·죄인을 잡아 심문)의 명이 있었고, 다시 쓰이기는 하였으나 겨우 1년이 지나서 유탄을 맞고 고종(考終·천수를 누림)하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금하랴?”

이종학은 1997년 9월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한산도가(閑山島歌)’의 친필원본을 공개하면서 ‘이순신 학자’로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특히 충무공이 ‘한산도가’를 장소와 연도를 바로잡아 큰 주목을 받았다. ‘한산도가’는 1595년 한산도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정유재란으로 한산도를 빼앗긴 후인 1597년 8월 보름, 전남 보성 열선루(列仙樓)에서 한산도를 바라보며 쓴 시라는 것이다.
당시 한산도는 왜군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썼듯이 당일 열선루에서 밤을 보냈고, 친필 한시 끝에 1597년 ‘정유중추’라고 명시했다고 했다. 또 제목과 달리 본문에 한산도의 ‘한(閑)’자를 차가울 ‘한(寒)’으로 쓴 것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궤멸상태에 놓인 조선수군을 해산하라는 왕명을 받고 슬프고 처연한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것 같다”고 해석했다. 발췌요약 : 김동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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