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가장 비극적일 때 패배가 아니라 승리”라고 니체는 말했다.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은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세속인들은 비극적인 삶이라 했다. 아니다. 정월 나혜석은 니체의 말처럼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나혜석은 시대를 초월하여 사라지지 않는 불꽃이다. 진정한 예술가가 치러야 하는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장렬한 불꽃을 터뜨리며 파멸하는 과정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같은 삶을 살았다.
나혜석은 문학이 사회적 실천이라고 믿었다. 문학이 여성 지식인이 활동할 수 있는 공적 영역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나혜석의 단편소설,「경희」가 나온 지 100년이 지났다. 여성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경희」는 200자 원고지 125장 길이의 역작이다. “아이구, 무슨 장마가 그렇게 심해요.” 하며 담배를 붙이는 뚱뚱한 마님은 오래간만에 오신 사돈 마님이다.로 시작되는「경희」가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8년이다. 1918년3월에 발표된 소설이다. 김동인이나 염상섭보다 일찍 한국 근대소설로 등장한 작가이자 작품이다. 나혜석의 첫 작품인「부부」가 쓰인 1917년은 한국 근대문학의 기념비라는 춘원 이광수의 장편 무정이 발표된 시기와 맞물린다. 이 시기에 나혜석의 소설이 세 편이나 쓰인 것은 나혜석 문학의 위상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나혜석의 문학은 30여 년간 묻혀 있었다. “여성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는 여성의 해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근대문학의 발생과 여성해방사상의 유입은 서로 관련이 있다.”고 로자린 마일스는 말했다. 나혜석이 여성해방사상 수용과 함께 소설을 써서 발표하였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당시 남녀작가를 통틀어 나혜석의 소설 솜씨와 위상이 그만큼 인정받는 이유다. 한국여성주의 문학의 보물1호이자 100년을 앞서간 진정한 의미의 선구자로 이 시대에 우뚝 섰다. 한국 최초의 본격 페미니스트 작가가 나혜석이다. 여성작가가 쓰는 소설은 필연적으로 페미니즘 문학을 낳게 되어 있는 것이 근대 여성문학의 특징이 아닌가. 나혜석은 페미니즘 소설을 쓴 데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평생 동안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스스로 검증하며 자신의 삶을 그에 따라 산 작가다.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혜석은 수원의 유력가문 나주나씨 나기정과 최시의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삼일여학교(현재 매향여고)와 진명여고보를 거쳐 일본 동경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나혜석은 3월5일 이화학당의 만세운동 참여로 일제에 의해 검거되어 5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재판결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그는 유화가로 활동하면서도 다양한 소설과 수필을 통해 당시 남성 중심적 가치관과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등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1896년 수원 신풍동에서 출생하여 1948년 무연고 행려병자로 사망한 나혜석의 삶은 그야말로 영광과 비극이 점철된 것으로 다른 어떤 근대적 여성과도 구별된다. 다면적 얼굴을 지닌 비극적 주인공 나혜석은 조선 최초의 여성화가로 그리고 한국근대문학 초창기인 1918년 단편소설과 시를 발표한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로 세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전반부는 총명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날리는 시기다. 조선 최고의 명성을 가진 여성으로 살았다. 인생의 후반은 몰락한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나혜석은 2000년 2월 정부가 선정한 문화인물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수원인계동에 ‘나혜석거리’가 조성되어 나혜석 청동조각상이 세워졌다.『여자계』잡지에 발표된「경희」는 자전적 소설이다. 일본유학생인 주인공 경희가 첫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와 부모로부터 결혼을 강요받는데서 시작된다. 나혜석이 실제 겪은 일이기도 하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가부장제가 가지는 모습을 비판한 나혜석의 소설「경희」는 최초의 근대 여성문학이다. 소설가로서의 나혜석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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