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명예의 전당 인물사-19세 나이로 순국한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상편>

 

출생: 1902년 5월 25일 수원군 산루리(현 수원시 중동)출생
귀천: 1941년 4월 21일 별세

“이선경은 수원출신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다. 경성여자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한 ‘구국민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석방되었다.
집으로 옮겨지고 난 뒤 9일 만에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여성 사회주의자로 명성을 날렸던 언니 이현경과 동생 이용성 등 형제자매의 활약은 수원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프로필 profile

1902. 5. 25.         수원군 산루리(현 수원시 중동)출생
1918.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교)졸업
1918.                사립 숙명여학교 입학
1919.                3.5 만세시위에 참여. 구속된 뒤 3월 20일 무죄방면
1919. 9.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진학
                     혈복단 활동, 구국민단 활동
1920. 8.             구국민단사건에 연루되어 일제경찰에 체포 구금됨
1921. 4.             모진 고문으로 궐석재판 끝에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선고받음
1921. 4. 21          석방 9일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수원자택에서 순국(19세)

수상 award

2012. 3.              애국장 포상


“언제부터 조선독립에 대한 생각을 가졌는가?”
“어른들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들었으니 태어났을 때부터요”

“그 생각이 옳다고 생각 하는가”?
“정의의 길이라 생각하오”

“만일 석방된다면 다시 이 운동을 벌일 생각인가?
“그렇소 석방되어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

-1920년 8월 구국민단 사건으로 체포 당시 심문과정에서-


“석방되어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

1920년 8월 구국민단 사건으로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 등과 함께 일제에 체포된 이선경은 심문과정에서 재판장의 질문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거침없이 답변했다.
이러한 이선경의 모습을 보면 그녀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확고하고 애국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기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이선경은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한 수원지역의 중요한 독립운동가 중 한사람이다. 그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대표적인 여성 사회주의자로 명성을 날렸던 언니 이현경과 일찍부터 누나 이현경의 사회주의적 영향을 받아 수원 청년동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동생 이용성으로 이어지는 형제자매의 활약은 수원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학적부에 ‘온순하지만 책임감 강한 성격’ 기재

이선경은 1902년 5월 25일 경기도 수원면 산루리 406번지(현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서 2남 2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다. 제적부에 따르면 이선경은 광주이씨로 광주이씨는 파장동을 중심으로 대대로 살아온 수원의 대표적 가문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선경 가계는 파장동 광주 이씨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이학구(1863년생)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그는 당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자식 3남매를 고등교육을 위해 서울과 개성,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였으니 이는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선경은 학적부에 아버지 직업을 ‘상업’으로 적었고, 언니 이현경의 학적부에는 ‘금대업’으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 수원이 상업적으로 번성하였던 이유는 대금업자가 폭넓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성안사람들 대부분은 변돈(이자를 무는 빚돈)을 놓아 돈을 버는 대금업을 부업으로 갖고 있을 정도로 수원지역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선경의 아버지 또한 대금업을 하면서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선경의 제적부에 처음 기재된 이름은 ‘애기(愛基)였으나 후에 ’선경(善卿)으로 고쳤고 언니는 ‘간난(看蘭)이었다가 ’현경(賢)으로 바꾸었다. 이들 자매가 이름을 바꾼 때는 1916년 6월 3일로 되어있다. 당시에는 대부분 처음 태어나서 간난이와 아기, 애기 등으로 불리다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서 개명을 하였는데 현경, 선경, 자매도 이러한 사회적인 관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선경은 1918년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4월 30일 서울의 사림 숙명여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2학년 때인 1919년 3월 5일 서울 학생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구속되어 3월 20일 무죄 방면되었던 전력을 갖고 있다.
그는 숙명여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1919년 9월 1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였다. 이 학교는 언니 이현경이 1917년에 졸업한 학교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전학한 이선경은 2학년(1~3학기)성적과 3학년 1학기 성적만이 기재되어있다. 3학년 1학기도 결석일수가 무려 22일에 이르고 있다. 그 후 이선경은 1920년 8월 31일 3학년 1학기를 마치면서 학교규칙 제35조 제4항에 다라 퇴학조치를 당하였다. 이는 1920년 8월 구국민단을 박선태 등과 결성하여 비밀리에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생긴 결석 때문이었다. 이선경은 1920년 8월 10일 전후에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측은 이선경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김백순 등 8명에게 퇴학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선경과 함께 체포되었던 이화학당의 임순남, 최문순 등도 결석을 하였지만 퇴학조치를 당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총독부가 운영하는 관립 경성여자보통고등학교는 이선경이 독립운동을 하여 결석하였다는 이유로 퇴학처리를 한 것이다. 한편 이선경의 학적부의 성격과 행동 평가란에 ‘표면으로 온순하지만 책임감이 강하다(記主人物)’라고 표기되어 있는 점은 이선경의 강직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수원화성 장안문에서 발견된 낙서-

떨쳐 일어나 한국청년아 저주하자 남차랑을
성씨를 바꾸게 한 놈을 때려 죽이자
성을 바꾼 놈은 짐승이다
대한 독립의 비碑
황국신민서사를 부르짖는 o o o o  o o o o 청년단
타도일본
주살呪殺 남차랑
대한 만세
타도 일본, 일어나 한국 청년아
황국신민이란 무엇이냐
우리는 대한국민이다. 일사一死로 일본을 타도하자
우리는 대한국민이다. 일치단결하여 남차랑을 때려죽이자
죽이자 남차랑놈을
대한독립만세, 타도 仇敵구적 일본

-자료출처 수원사람들의 독립운동, 수원박물관 2015-


구국민단 활동, 조국의 독립을 꿈꾸다

이선경은 숙명여학교에 재학 할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독립운동을 꾸준히 펼쳤다. 수원에서 함께 서울로 유학하여 공부하던 이화학당 2학년생인 임순남(임효정), 최문순 등 여성동지들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또 다른 선을 대고 있었던 박선태, 이득수를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과 1920년 6월 7일 수원 서호부근에서 만나 혈복단을 구국민단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논의에 참여했다.
1920년 6월 20일 구국민단의 조직을 개편하게 되었는데 단장 박선태, 부단장 이득수, 서무부장, 임순남, 재무부장 최문순, 교재부장 차인재로 조직하고, 이선경은 구제부장을 맡았다.
이들은 수원에서 서울로 유학을 간 젊은 학생들로, 이선경은 구국민단의 임원을 맡아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밖에도 수원에 거주하고 있던 김석호, 윤귀섭, 김병갑, 이희경, 신용준 등이 동지가 되었다.
근대 수원역사에서 구국민단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구국민단은 수원최초의 비밀결사 사건이면서 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비밀조직이라는 점 때문이다.
구국민단은 혈복단과 관련이 있고 혈복단은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활동한 비밀결사 대한독립애국단과 연관이 있다. 대한독립애국단의 단장 신현구가 1919년 11월 20일 체포되어 조직이 와해되자 혈복단으로 재정비한 것이다.
  구국민단 부단장 이득수는 이전부터 조선독립을 희망하여 이를 선전하기로 결심하고 1919년 3월 말부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차관호와 연락했다. 이득수의 한문선생이었던 차관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동정과 조선독립에 관한 기사를 실은 ‘독립신문’과 ‘대한민보’등을 이득수에게 보내왔으며, 가끔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을 격려하는 편지도 보내왔다. 이에 이득수는 독립신문 등을 동지였던 삼일여학교 여교사 차인재와 함께 수원면 내의 각 조선인 집에 배포하였다. 이와 함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창가집’ 등도 만들어 배포했다. 당시 구국민단은 2대 목표를 세워 추진해 나갔다.
“첫째는,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제국통치하에서 이탈케 하여 독립 국가를 조직할 것.”
“둘째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어 있는 유족을 구조할 것.”
이를 위해 1920년 7월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수원 삼일여학교(현 매향여고)에서 만나 독립신문의 배포를 논의했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간호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도울 것을 맹세했다. 이에 이선경, 임순남, 최문순, 등 여학생 3명은 상하이 임시정부 적십자회에 들어가 간호원이 되어 후에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힘을 보탤 준비를 했다. 따라서 구국민단의 결성은 대한적십자회의 회원 모집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여학생들은 간호원이 되어 독립전쟁에 참여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활동하던 이선경은 1920년 8월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실제로 구국민단이 결성되고 몇 달도 안되 체포되었던 것이다.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구국민단 사건의 재판과정은 신문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구국민단의 활동인 독립신문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동정, 조선독립에 대한 기사를 기재한 인쇄물을 수원지역에 배포하고, 조선독립사상을 선전하는 동지를 모집하는 한편 향후 조선독립전쟁을 대비해 준비를 했다는 점 등이 상세히 보도됐다.
특히 이선경은 조선독립전쟁에 대비해 상하이로 건너가 간호원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자 결의하고 준비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알려지게 됐다.
수원 혈복단을 조직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이득수였다. 그는 경성기독교청년학관 학생으로 수원 하광교리 출신이었다. 이득수는 정동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이선경과 이현경도 정동의 성공회 성당에 있는 학생 기숙사를 이용하였기에 이들은 서로 가깝게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여학생들을 조직하는데 삼일여학교 교사 차인대의 역할도 중요했지만 이선경의 역할도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삼일여학교 출신인 임순남(임효정)과 최문순을 소개한 사람은 삼일여학교 교사 차인재이지만 여학생들을 조직하여 역할을 하도록 한 사람은 이선경으로 보인다.
이후 이득수보다 구구민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은 박선태였다. 이선경이 같은 동네 출신인 박선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학생들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선경이 체포되었을 때 이선경에 대한 고문의 강도가 심했고 이 때문에 석방된 지 9일 만에 숨을 거두는 상황만 보더라도 이선경이 구국민단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선경은 삼일여학교 출신의 여학생들보다 1년 선배이고, 조직 결성의 핵심적 역할을 한 이득수(이종상)처럼 서울 정동에서 하숙을 하였고, 이후 구국민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박선태와 같은 동네 출신인 점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선경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간호원 양성계획과 연관되어 일제 경찰의 조사·심문을 집중적으로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결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 일제는 이선경을 집요하게 추궁했을 것이고 이에 이선경은 치명적인 피해를 당해 순국했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발췌요약 : 김동초 선임기자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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