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명예의 전당 인물사/수원을 일깨운 근대교육자·독립운동가 임면수

 

1903년 29세의 임면수는 젊은 동지들과 함께 수원 삼일여학교를 설립했다. 이하영, 나중석은 인척관계이자 동지였다. 이성의, 최익환. 홍건표, 차유순, 김제구 등도 참여했다.
삼일학교는 북감리교회로 운영권이 넘어가면서 설립 후 3년이 지난 1906년에 이르러 재정적으로 어려워졌다.
이에 부호 강석호는 1906년 5월 거금을 기부했고 나중석도 부지 900여 평을 기증했다. 임면수도 10원을 희사해 삼일학교의 주춧돌을 다졌다.
삼일학교는 1906년 9월 1일 심상과와 고등과로 개편됐다. 1년 과정인 심상과 교과목은 성경·국어·역사·산술·영어·체조 등이었다. 3년제인 고등과는 성경·한문·국어·수신·생리·광물·문리·산술·본국역사·본국지지·만국역사·만국지지·작문·도화·체조 등이었다.
이렇듯 교과과정 정비는 교육내실화를 도모하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 체조 과목은 매우 중시되었는데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병식체조와 행군은 학생들에게 상무정신을 고취시켰다.
이 과목은 구 한국군 출신인 강건식에 이어 송세호가 담당했다.
임면수도 초기에는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했으나 점차 학교 교육이 확장됨에 따라 교감 직을 맡게 됐다. 당시 교장은 명예교장이었고 사실상 실무자는 교감이었다. 임면수는 학교 발전을 위해 집터와 토지, 과수원을 학교에 내놓았다. 현 매향정보중고등학교가 자리 잡은 곳이 그가 희사한 땅이다.
1909년 임면수는 삼일학교 교장이 되어 관내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주도하거나 후원하는 등 교육가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삼일학교는 수원지역 항일운동의 요람으로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기호흥학회 수원지부에서 활동

임면수는 삼일학교에서 교감으로 일하는 한편 기호흥학회 수원지부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학회는 1907년 기호지방 출신 인사들이 조직한 모임이다. 이 학회를 주도한 인사는 정영택, 이우규, 이용직, 지석영, 유성준, 석진형, 이상재. 윤효정, 장현식, 정교, 장도, 우근, 유일선, 안종화 등이었다.
 학회의 궁극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민족을 살리는데 있었다. 또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은 원인을 실력부족으로 보아 실력 향상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다.
실력을 양성하려면 교육이 진행돼야 하며 교육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기호흥학회는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또 그 인재를 전국각지에 파견하여 청년을 지도하고자 했다.
회보도 발간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교육진흥을 강조했어도 근본 목적은 물론 독립·애국사상의 고취에 있었다.
 기호흥학회는 서울에 중앙회를 두었는데 중앙회에는 회장, 부회장, 총무, 회계, 서기 각 1인, 간사2인, 다수의 평의원을 두었으며 교육부, 재무부, 찬무부 등 3부로 나누어 운영했다.
그리고 교육활동과 관련한 새로운 사업은 전담위원을 선정하여 추진했다.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였는데 경기도 광주, 수원, 양근, 장단, 교하, 강화, 풍덕, 충북의 청주, 충주, 제천, 영동, 충남의 서산, 해미, 공주, 목천, 연산, 당진, 홍주, 청양 등 19개 군이었다.
기호흥학회는 지회 설립인가에 박차를 가했고 임원진이 노력한 결과 1909년 3월 말까지 경기도내 광주, 양근, 강화 등 7개 지회 설립인가를 얻어냈다.
기호흥학회 월보 제2호 (1908년 9월 25일)에 수원지회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최성대 등 39인은 ‘설립인가 청원서’를 본회에 제출했다. 본회는 수원지역 근대교육확산을 위하여 교육부장 김가진과 평의원 조완구를 특별위원으로 파견한 후 1908년 6월 14일 평의회에서 이순하 동의로 설립인가를 가결시켰다.
 흥학을 위해 본회는 각지에 권유위원을 파견했고 이는 수원지역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진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만주 망명과 신흥무관학교 개설 참여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7년 안창호, 양기탁, 이회영 등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신민회라는 비밀결사대가 조직됐다. 1909년 봄 일제에 의한 조선 강점이 거의 확실시되자 우국지사들은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양기탁의 집에 이동영, 주진수, 안태국, 김구 등이 모여 비밀간부 회의를 열고 해외독립기지 건설과 군관학교 설치 등을 의논했다.
 그 결과 서간도 지역의 한 장소를 선택하여 동지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해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1910년 임면수는 일제에 조선이 강제 병합되자 서울로 올라와 비밀리에 신민회에 가입하고 양기탁의 집에서 열렸던 구국운동회의에 참여했다.
신민회의 구국운동  의에 따라 임면수는 모국을 떠나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심했다. 삼일학교 운영은 나흥식에게 위탁했다. 1910년 10월초 임면수는 극비리에 가족을 이끌고 봉천성 환인현 횡도촌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곳에 먼저 정착한 이회영(독립운동가, 1867~1932)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1911년 봄에 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만들었다.       
그해 6월에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농가 2칸을 빌려서 신흥강습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한 추가가는 사람과 말의 왕래가 잦아 독립운동 기지로서 는 적절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통화현 합니화는 동남쪽으로 고뢰산이 가까이 있고 북쪽으로는 청하자의 심산유곡이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폐가동의 장산밀림이 펼쳐진 곳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신흥강습소를 합니하로 이전했다. 교직원과 학생들은 함께 힘쓴 끝에 1913년 5월 신흥강습소 교사 낙성식을 열 수 있었다. 학교 명칭은 신흥중학으로 바꿨다. 수만 평의 연병장과 수십 칸의 내무실 내부는 생도들이 합심하여 만들었다.                            이로써 통화현 합니하는 독립군 무관 양성의 대본영이 되고 구국혁명의 책원지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신흥중학교는 1914년 거듭되는 천재로 운영이 어려워졌고, 둔전병제도를 통하여 학교의 재정을 충당하고자 했다.
임면수는 만주 지역의 상황이 열악해지자 신흥무관학교 유지비와 군사 훈련비를 조달하고자 영하 40도의 한파와 적설을 무릅쓰고 썩은 좁쌀, 강내기, 풀나무 죽으로 연명하면서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했다.
부인 전현석도 수시로 방문하는 별동대, 특파대 등의 식사를 하루 대여섯 번이나 준비하여야 했고 그들의 보따리와 총기를 맡아 챙겨주는 등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독립군으로서 그녀의 밥을 안 먹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인내심과 온순함, 예의바른 행동에 누구나 머리를 숙였고 ‘독립의 어머니’로 칭송을 받았다.
임면수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 당시 독립운동자로 선생 댁에서 잠은 안 잔 이가 별로 없고,
그 부인 전현석여사의 손수 지은 밥을 안 먹은 이가 없으니 실로 선생 댁은 독립군 본영의 중계 연락소이며, 독립운동객의 휴식처요, 무기보관소요, 회의실이며 참모실이며 기밀 산실이었으니.”
장남 宇相(우상)도 만주에서 20세에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1919년 국내에 잠입하여 김세환 등과 군자금을 마련하고 만주로 돌아가던 길에 동상을 입어 만주에서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독립운동기지로서 객주업 운영

임면수와 그의 아내는 독립운동 기지로서 객주업을 운영해 독립군의 중계연락소, 휴식소, 무기보관소, 회의실 공간으로 제공했다.
 만주지역에서 활동할 때 임면수는 임필동이라는 이름을 주로썼다. 불령단관계잡건 재만주부1914년 12월 28일 ‘불령자처분’ 자료의 별첨 자료 ‘서간도재주 불령선인조사’ 총 54명중에 임면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거주지: 통화현
원적지: 수원
성명: 임필동(林弼東)
연령 추정: 50
비고: 객주업을 하는 유력자
이 자료에는 50여명의 독립운동가가 통화현, 유하현, 환인현, 해룡현 등지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 중 통화현 합니하에 거주하는 인물이 다수고 임면수는 통화현에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54명 중 대부분이 신흥학교 관련학자 또는 교사들이고 임면수처럼 객주에 종사하는 인물은 4명이다. 이 중 임면수만을 유력자로 표현하고 있다.
임면수가 독립운동가로서 여관업에 종사하였음은 일본외무성문서 ‘불령단관계잡건’ 재만주부 1916년 8월 5일자 ‘배일선인 비밀단체 상황취조의 건’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부민단에서는 1916년 3월 16일 회의 결과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가 날로 위험해 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200명으로 구성된 결사대를 편성해서 통화현에 일본영사관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강력히 제지하고자 했다. 이들 중 7~8명은 통화현 시가에 잠입했다. 일본 측 정보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통화현 동관대가 거주의 여관영업자, 경기도 수원부생 임필동은 이런 종류의 무리’라고 언급하면서 임면수를 그 중 한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불령단관계잡건 대만주부 1916년 9월 9일자 재안동영사가 일본외무대신에게 보낸 ‘재만 조선인 비밀결사 취조의 건에 대한 회답’에도 임면수가 언급되고 있다. “당지(통화현)의 배일자 중 유력자인 결사대원 임필동”이라고 되어 있어 당시 임필동이 통화현의 우력 항일 독립운동가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독립군의 본거지 만주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활동

임면수는 1910년대 중반에 만주 통화현 합니하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이 학교는 제2 신흥무관학교 격이었다.
1909년 수원에서 삼일학교의 교장으로 근대민족교육을 실천했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양성중학교는 대동중학교에서 출발하여 신흥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다시 양성중학교로 개명했다.
양성중학교는 합니하 남구 사차에 있었다. 합니하는 1910년대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민족교육의 산실로서 자리 매김한 항일운동의 요람이었다. 또 교수로 재직한 이세영과 재무감독 이동녕 등은 신흥무관학교의 실질적인 중심인물들이었다.
 양성중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국어문전, 대한신지지, 대한국사, 유년필독 등의 과목을 통해 한글, 한국사, 한국지리 등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임면수가 교장으로 근무했던 양성중학교에 대해서는 ‘현대사 자료’(1919년), 강덕상편에 잘 나타나 있다.
“양성중학교
합니하 남구 사차
排日主意
1915년 4월 양성이라고 개칭
교장 임필동
교수 이세영
교사 차정구, 김장오, 사인식, 이문학, 신기우, 윤진옥, 재무감독 이동녕, 기숙생21, 통학생41, 학생연령 15세에서 28세까지“

독립활동과 체포, 수원으로 귀향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 수많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일본군들은 1920년 간도로 출병하여 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가를 체포·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임면수도 해룡현 북산성자에서 일본군 토벌대에 체포되어 중국에서 추방당했다.
 임면수는 정일택, 한원기, 이용도 등과 함께 1920년 6월 12일 밤 해룡현 북산성자 삼도가에 재주하는 김강의 집에서 김강의 부재중에 그 지역의 일본 경찰관과 친일 조선인 등을 암살하고 남만철도연선에 거주하는 동지들을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려 한 혐의로 체포되어 조선으로 추방당했다.
 임면수는 압송되어 가던 중 한국인 경찰 유태철의 도움으로 중국인 여관에서 번잡한 틈을 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걸어서 14일 만에 길림성 이통현 고유수 한인 농촌마을에 도착하여 동포 박씨 집에 은둔했다.
그곳에 머물다가 장춘을 거쳐 부여현에 도착하여 안승식의 도움을 받았고 그의 집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러나 1921년 2월경 길림시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던 중 밀정의 고발로 길림영사관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전신이 마비된 상태로 석방되어 수원으로 귀향했다.
임면수는 고향수원으로 귀향했지만 거처할 방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1923년 삼일학교 아담스 기념관 건축 감독으로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30년 11월 29일 5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64년 세류동 공동묘지에 안장됐던 임면수의 유골은 삼일상고 동산으로 옮겨졌고 기념비도 세워졌다. 1980년에는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현충원에 안장됐다. 2014년 손자 임병무씨는 유품을 수원박물관에 기증했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에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됐다.
발췌요약 : 김동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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