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명예의 전당 인물사/SK그룹  故 최종현 제2창업주

 

최종현회장은 1929년 11월 29일 수원 평동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8월 26일에 별세했다. 최종현은 형 최종건이 창업한 선경을 국내 4대 그룹의 하나인 SK로 키워낸 제2창업자다.  SK를 성장시킨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은 세계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든다. 형이 섬유업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면 최종현은 석유, 화학, 이동통신 등 중화학, 미래 산업으로 사업을 확장,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시켰다. “인간위주의 경영, 합리적인 경영, 현실을 인식한 경영”이라는 경영철학을 실천했다. 인재양성에 관심이 컸던 최종현은 30여 년간 장학 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최종현은 1973년부터 1987년까지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다.

최종현의 경영철학, 인간·집념·최고

최종현의 경영철학은 ‘인간위주 경영’ 이라고 압축 할 수 있다. “기업경영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기업경영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인간 위주의 경영이며 이를 위해 사람을 사람답게 다룬다는 기본 원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라고 틈만 나면 강조했다. “사람을 믿고 기르는 것이 기업의 처음이자 마지막 목표”라고 했다.
최종현의 인간중시 경영은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으로 나타났다. 계열사 사장에게 권한을 대폭이양, 계열사별 책임경영 체제를 일찌감치 구축했다. 그는 “최고 경영인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기업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구상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믿고 일을 맡긴 이상 그를 철저히 믿어야 한다”며 사장단에게 책임과 권한을 위임, 자율경영을 최대한 뒷받침했다. 다만 능력, 성실성, 인격을 모두 갖추지 않으면 결코 경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런 자격을 갖춘 이에게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최종현은 사장들에게 방해가 된다며 정오쯤 돼서야 출근했고, 서류에 회장 결재란을 없애 자율경영을 최대한 뒷받침했다. 그러면서 결코 사회규범에 어긋나는 경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이윤추구의 명목으로 사회규범에 어긋난 경영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사회규범 준수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보여 왔다.
SK그룹이 신입사원 전원을 대상으로 몇 명씩 조를 짜서 해외로 패기를 기르는 훈련을 보내는 것도 젊은이들에게  도전정신을 일깨워주고 이를 경영의 근간으로 삼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깊이 작용했다. 기업의 발전은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 손에 달린 것이기에 무엇보다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최종현은 생각했다.
그러려면 SK의 기업관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도록최선의 제도와 교육환경을 조성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1960년은 설비 경쟁의 시대였고 앞으로는 경영경쟁의 시대”라며 SK만의 경영시스템인 SKMS(SK MANAGEMENT SYSTEM)를 1970년대 말에 선포했다. “사람은  일정 기간 기여하다 떠나는 것이고 기업은 영원이 존속한다.” SKMS(SK MANAGEMENT SYSTEM)서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시카고학파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경영이론은 수십 년 동안 직원들과 끊임없는 토론을 하는 과정을 거쳐서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SKMS(SK MANAGEMENT SYSTEM)는 보통의 경영학자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세계적인 기업경영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론의 핵심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성실하게 직무에 임할 때 구성원과 기업과의 사이에 신뢰가 생기며 좋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집념

최종현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사업목표가 정해지면 일에 매달리는 집념은 아무도 최종현을 따라오지 못했다.
이 같은 집념은 회사 경영이념으로 SUPEX를 추진한 것이나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 계열화사업구조를 확립하는 데 성공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종현의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일 쇼크시절, 석유화학산업 진출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섬유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석유화학산업에 진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소신을 갖고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끝까지 굴하지 않고 도전한 것이 성공의 주요인이다.”
최종현은 1966년 1월 아세테이트, 폴리에스터 원사 공장을 짓겠다는 ‘선경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럴 여건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임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배포가 큰 형 종건도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종현은 일본에서 외자를 도입해 공장건설을 성사시켰다.
1977년 컴퓨터와 오디오의 자기 테이프 등에 사용되는 폴리에스터 필름을 독자 기술로 개발한 것도 집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그 기술은 4개국만 보유한 최첨단 기술이어서 회사간부들이 일제히 반대했지만 최종현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과 함께 기어코 개발에 성공했다.
유전 개발도 마찬가지로 집념의 산물이었다. 유전 개발에는 자본은 물론 고도의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며 모두 만류할 때 가능성이 55에 불과하더라도 할 수 있으면 도전해야 한다고 했다. 바로 최종현의 집념이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섬유기업을 에너지, 화학, 정보통신 그룹으로 키운 밑거름이 된 것이다.

최고를 추구한다. SUPEX

최종현의 경영이념은 이른바 ‘수펙스(SUPEX)’ 정신이다. 최종현은 1980년대 후반에 세계경제의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행되자 SKMS만으로는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21세기 일류기업을 목표로 SUPEX 추구를 추진했다.
SUPEX(Super Excellent)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수준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이왕  할 거면 수퍼 엑셀런트하게 잘 해보라”고 최종현은 수시로 강조했다. ‘우수’나 ‘탁월’ 정도로는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개인과 조직의 능력을 극대화해야 기업이 발전하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최종현은 1990년대 초에 일찌감치 글로벌리제이션(국제화)을 주창했다.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독려하면서 세계 선진국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정도의 경쟁력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진리를 각인 시켰다. 그는 연설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로벌 시대의 도래를 언급하며 이에 대한 대응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최종현이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의 경영환경에 대비하고자 1989년에 마련한 이념이 바로 SUPEX다.
그는 SUPEX정신을 SK그룹 임직원들에게 깊이 심어주고자 경영활동의 대부분을 각 계열사의 SUPEX 추진 상황을 보고받는 데 할애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나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각 계열사의 SUPEX 보고를 어김없이 진행했다. SUPEX 추진 목표와 계획은 부서별 성격에 맞게 자율적으로 선정됐다.


이 SUPEX 보고는 계열사 사장들이 아닌 각 회사 부장과 부원들이 직접 자기 부서의 추진 계획과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형식이었다. 최종현은 이들과 장시간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종건·종현의 형제 경영

서울대 진학, 다시 미국 유학길로
최종현은 1929년 11월 21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읍 坪洞(평동) 벌말부락에서 아버지 최학배와 어머니 이동대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 조상의 고향은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해창리였으나 아버지가 평동으로 이사했다.
유학자 집안이었지만 물려받은 땅도 없는 가난한 가정이었다. 아버지 최학배는 수원으로 집을 옮긴 뒤 나무장사로 돈을 벌었다. 그러다 대성상회를 설립해 볏짚과 잠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평동 주변 땅을 많이 사들여 부농이 됐다. 최종현의 형 최종건은 세 살 위였다. 최종건은 열정과 집념으로 대기업을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최종건은  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열여덟 살 때 일본인이 운영하던  선경직물 견습기사로 취직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 선경직물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최종건은 폐허 속에서 부품들을 수습해 직기4기를 재조립해 회사를 살려냈다.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인수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사이 최종현은 형과 달리 학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수원 세류소학교를 거쳐 수원농림중학교를 1950년 3월 졸업했다. 서울대 농기계학과로 진학하자마자 6·25를 맞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서울대를 중도에 그만두고 최종현은 유학을 준비했다. 유학을 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고 아버지의 재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최종건도 선경직물을 인수할 자금을 아버지에게 요청하려 했지만 동생의 유학자금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아버지도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이런 집안 사정을 알게 된 최종현은 아버지에게 “학업을 포기해도 좋으니 형이 공장을 인수 하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아버지는 최종현의 유학을 조금 늦추고 형 종건의 공장 인수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인수해 본격적인 공장재건에 착수했다.
형 최종건의 사업에 동참하다.

최종건은 자신을 위한 동생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 공장을 인수해 돈을 벌자 동생 종현의 미국유학을 도왔다. 이렇게 해서 최종현은 1954년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화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최종현이 유학하는 동안 최종건은 사업을 단 기간에 키워나갔다.
‘닭표 안감’, ‘봉황새 이불감’이 대히트를 쳤고 나일론, 데도론을 생산하며 섬유업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선경직물은 종업원이 1,000명이 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업규모는 커지고 신제품 출시로 업계를 선도했지만 선경직물에는 불황도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1960년대로 접어들었을 때 섬유업계는 일시적인 공급 초과 현상이 나타났고 섬유회사들의 업 황이 나빠졌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였다.
1962년 10월 2일 아버지 최학배가 사망하자 최종현은 유학 도중에 귀국했다. 최종현이 귀국할 당시 선경직물은 종업원 임금을 4개월 치나 체불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형 최종건은 동생 종현에게 회사 일을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최종현은 석사과정을 마치긴 했지만 학업을 완전히 마무리 짓지 못하고 형과 함께 회사 경영을 맡게 되었다. 최종건으로서는 큰 우군을 얻은 셈이었다.
최종현에게 경영에 도움을 줄 기회가 일찍 찾아왔다. 미국 정부가 원사수입전용 달러를 50%감액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최종현의 시중의 수입 달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탁월한 판단이었다. 미국 정부는 예상대로 1963년 원조를 감축했고 국내에 원사 파동이 닥쳤다.
하지만 원사 매입 달러를 충분히 확보한 선경직물에는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되었다.

신제품으로 위기를 극복하다.

최종건과 최종현은 국내를 벗어나 외국으로 눈을 돌렸다. 섬유업계로서는 첫 도전이었다. 홍콩의 광흥공사와 손해를 감수하면서 끈질긴 협상을 벌여 레이온 42만 6,000달러어치를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최초의 인견사 수출이었다. 최종현은 형과 함께 원사확보와 재고 소진을 동시에 해결했다. 무엇보다 국내 섬유의 수출 길을 뚫은 것은 수출 사에 남을 큰 업적이었다. 그 공으로 최종건은 건국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최종현 귀국 1년만의 일이었다. 선경직물은 위기 때마다 크레폰이나 앙고라 같은 신제품을 출시하며 극복했다. 항상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며 사세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최종현은 단순한 직물공장 만으로서는 성장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1966년 초 최종건 회장의 40세 생일에 맞춰 회의가 열렸다. 최종현은 그 자리에서 원사공장에서 봉제공장에 이르는 수직적 다각경영을 제안했다. 바로 앞에서 말한 ‘선경 5개년 계획’이었다.

섬유, 원사 수직 생산체계 확립

당시 하루 7.5톤 규모의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투자액은 29억 원이었다.
선경의 자본금은 고작 1억 원에 불과했다. 선경과 비슷한 직물업체는 800개가 넘던 때였다. 일개 직물업자가 원사공장을 짓고 일본 데이진사가 독점하던 생산기술을 이전받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회사간부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배포 큰 최종건조차 머뭇거렸다. 그러나 최종현은 데이진사와 교섭을 벌인 끝에 3년 후 지불조건으로 300만 달러의 차관을 성사시켰다. 여기에 설비를 공급하기로 한 이토추사로부터 지불보증까지 받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업계관계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물차관 외자 유치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다. 선경은 원사공장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해 1968년 12월 아세테이트 공장을, 이듬해 2월 폴리에스터 공장(현SK케미칼)을 완공했다. 두 공장의 건설로 하루 35.5톤이던 한국의 원사 생산능력은 48톤으로 단번에 38%가 뛰어 올랐고 선경은 국내 최대의 원사생산 업체로 부상했다.
최종건, 최종현 형제는 석유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꾸준히 타진한 끝에 선경은 1972년 정부로부터 제4 정유공장 건설 인가를 받아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최종건이 폐암 진단을 받았다. 1973년 7월 최종현은 선경유화를 설립하고 하루 생산 15만 배럴 규모의 원유를 공급받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일본 측 파트너 세지마 류조 이토추 사장도 동행했다. 최종현은 폴리에스터 수지 공장을 건설해주는 조건으로 석유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발췌요약 : 김동초 선임기자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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