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을 빛내다, 명예를 높이다/수원 명예의전당 인물사

SK그룹 고 최종건 창업주

 

맨주먹으로 일으켜 세운 회사

최종건은 팔탄면으로 피난을 갔다가 좌익 청년들의 밀고로 내무서에 잡혀갔다. 해방 직후 수원태백동지회 부회장과 평동 대동 청년단 단장을 맡았던 데 문제였다.
그러나 그 들이 말하는 악질분자로 몰릴 만큼 우익활동을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의 위기에 몰린 그를 구해준 사람은 광복 직후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최종건의 도움으로 풀려나온 이성길이라는 사람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지인의 제의로 잿더미가 된 수원의 선경직물 재건 작업에 뛰어들게 된다.
잿더미 속에서 최종건은 옛 동료들과 함께 부서진 부품들을 모으고 땜질해 직기 4대를 만들어냈다. 1953년 5월 초순의 일이었다. 직기 4대를 돌리는 한편으로는 그는 없어진 부속을 철공소에서 만들어 조립해 모드 20대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직접 인수해 경영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인수대금이 문제였다. 결국 아버지의 도움으로 선경직물을 불하받아 1953년 10월 1일 선경직물을 창립했다. 사실상 맨주먹으로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봉황새 이불감의 대히트

그러나 공장을 재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물건이 안 팔려 재고가 쌓이고 돈이 돌지 않았다. 최종건은 도매상들로부터 문제가 도안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조욕광이라는 당대 최고의 도안사를 삼고초려 끝에 영입해 월급을 부장의 4배인 20만원을 파격적으로 주며 공장장을 맡겼다. 조용광의 노력으로 재고와 자금문제가 해결되었다.
엄청난 히트를 친 직물 제품도 조용광의 머리와 손에서 나왔다. 바로 ‘봉황새 이불감’이다. 책을 뒤져 봉황새 도안을 완성한 1958년 5월 드디어 봉황새 이불감이 출시됐다. 나오자마자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봉황새 이불감은 신부가 필수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혼수품 1호가 될 정도로 10년동안 직물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선경직물만이 소유하고 있던 대폭 직기로 짠 제품이라 독점상품이기도 했다. 시장에서는 프리미엄이 붙어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1962년에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선경직물은 봉황새 이불감으로 상공부장관상을 받았다.

한국최초의 나일론 생산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섬유업계는 전반적으로 불황에 허덕이고 있었다. 불황을 헤쳐낸 데 일등공신은 나일론이었다. 1958년 11월 최종건은 나일론 생산에 들어갔다.
한국 최초였다. 나일론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50년 한국전쟁 때로 미군을 통해서였다. 어떤 옷감보다 질기고 가벼우며 무엇보다 세탁이 쉽다는 점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국내에는 생산하는 업체가 없어 판매되는 제품은 모두 밀수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경직물이 국산 나일론 생산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원사를 구하기 어려웠다. 일본이 원사를 생산했지만 정부가 미국에서 원조자금을 받으면서 대일 구매 금지 정책을 폈기 때문에 일본에서 들여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수입해 올 수밖에 없었다. 최종건은 알고 지내던 비스코스 한국대리점 사장 김병세를 통해 나일론 원사를 1958년 11월 한국 최초로 수입해 제품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원사 공장건설, 일관 생산체제 확립

원사 때문에 생산에 차질을 빚는 일이 잦아지자 최종건은 직접 원사를 생산하기로 했다. 지인의 소개로 일본을 방문해 일본 4대 원사 메이커를 방문해 협력을 요청했다.
사실은 당시 선경직물의 공장 규모가 작지는 않았지만 원사 공장을 건설할 생각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최종건은 원사 공장 건설을 밀어붙이고 실현했다.
수교 이전에 일본인 사업가들과의 관계는 이후로도 이어져 데이진 기업의 오야 신조 사장은 자신들이 석유사업을 시작하면서 나중에 선경에 정유공장을 한국에 짓도록 제안했다.
최종건의 적극성이 한국 정유산업의 초석을 놓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기업들은 또 한 번 풍파와 맞서야 했다. 100개가 넘는 기업이 부정축재로 몰려 조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선경직물은 그 대상에 빠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공장을 일으켜 세워 자생력으로 성장한 기업으로 집권자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그해 9월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연락도 없이 공장을 방문했다.
박정희는 국산 섬유를 수출할 경우 외국 제품과 경쟁할 수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그 후 선경직물의 자금줄이 급속도로 풀렸고 국내 시장만이 아니라 세계시장으로 진출 할 길이 열렸다. 최종건은 서울사무소를 확대 개편해 수출시장을 뚫을 준비를 마쳤다.

홍콩에 섬유 처녀 수출 성공

드디어 1962년 2월 초순 ‘닭표 안감’ 10만 마(야드의 한자표기, 1마=약91㎝)를 수입하겠다는 홍콩 광흥공사의 신용장이 도착했다. 상표는 선경의 머리글자를 따 ‘SK’를 새로 만들어 붙였다. 일본 제품보다 싼 가격에 일단 수출을 하고 보자는 뜻에서 원가보다 낮은 가격을 매겼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밑지는 장사였지만 1962년 4월 8일 한국은 비로소 ‘인견직물 수출국’이라는 이름을 세계시장에 알리게 되었다.
처녀 수출에 성공한 후 최종건은 전 사원을 경기도 여주 한강변에 초대해 운동회를 열어 대대적으로 자축연을 베풀었다.
수출의 물꼬를 트고 1962년 봄에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선경직물은 상공부장관상을 받았다. 하지만 상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선경은 과잉경쟁과 통화개혁으로 직기에 차압 딱지가 붙을 정도로 어려운 경영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재고는 쌓여갔고 자금사정은 극도로 나빠졌다. 최종건은 내수만으로는 부족한 수요를 수출을 확대해 창출하기로 결심했다. 그 길은 무역회사를 직접 세우는 것이었다.
1962년 8월 11일 최종건은 자신을 대표이사로 하는 선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언어 장벽과 인력 부족으로 새 시장 개척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거래를 튼 홍콩 광흥공사에서는 주문이 계속 들어와 1962년에 4만 6,000 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동생 종현의 경영 합류

1962년 말 아버지 최학배 옹이 뇌진탕으로 사망하고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동생 최종현이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당시 1,000명이 넘는 종업원의 월급을 4개월 치나 못 주고 있을 만큼 선경직물의 회사 사정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최종건은 일시 귀국한 동생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최종현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박사학위를 마칠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우선은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해 경영을 도와주기로 했다. 형 종건은 외부 업무를 맡고 동생 종현은 내부 경영을 맡아 분권경영을 하기 시작했다.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최종현이 아이디어를 냈다.
1963년부터 USOM(미국대외 원조처)이 인견사 수입불 배정을 중단한다는 정보를 최종현이 입수했다.
원사를 도입하지 못하면 원사파동이 일어나 선경직물에도 큰일이었다. 악재를 호재로 바꾸자고 최종현이 제안했다. 즉, 원사파동이 일어나면 원사 값이 폭등 할 것이기 때문에 그전에 원사를 많이 확보해 두자는 제안이었다.
동생의 제안에 따라 최종건은 은행장을 찾아가 매입 자금을 빌렸다. 1963년 3월에 실시된 공매불 입찰에서 선경직물은 전체 공매불의 3분의 1을 낙찰 받아 섬유업계를 경악하게 했다.

민간기업 최초 금탑산업훈장 수상

그런 한편으로 최종건은 1962년의 수출실적에 따라 정부로부터 홍콩지역 인견능직 독점수출 허가를 받아냈다. 곧바로 동생 최종현을 홍콩에 보내 현지 수입업자들과 수출 상담을 벌이도록 했다.
최종현은 홍콩에 한 달 정도 머무르면서 인견능직 300만마를 주문받는데 성공했다. 1962년 처녀 수출액의 30배에 이르는 물량이었다. 밑지면서 수출했던 일이 좋은 결과를 부른 셈이다.
1963년 8월 15일 최종건은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직물업계로서는 물론 민간기업 대표로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수훈이었다.

크레폰과 앙고라의 잇단 히트

선경직물의 사업은 그 이후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1964년은 창업 이래 최고의 실적을 올린 해였다.
그해 새로 개발한 ‘크레폰’과 ‘앙고라’의 성공 덕이었다. 내수도 늘어났고 수출도 큰 실적을 올려 자금 사정도 어느 때보다 좋아졌다. 특히 그해 환율제도 변경으로 원사 가격이 급등했지만 일찍이 수출로 방향을 전환한 선경은 80여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려 경영여건이 호전되었다.
이제 최종건은 원사공장을 지을 생각을 했다. 폴리에스터나 아크릴은 다른 기업들이 생산 계획을 잡고 있어 선경은 사양 산업이라고 하던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짓기로 했다.
반대가 심했지만 최종건은 폴리에스터 원사 공장을 짓기 위한 전초전으로 삼으려 했다. 1964년 10월 15일 ‘제1회 수원의 날’ 행사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행사 후 선경직물 공장을 방문했을 때 그런 사정을 설명하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방문을 앞둔 서독의 총리 부인에게 줄 선물을 선경에 요청했다.
육영수 여사가 서독 방문 길에 입고 간 한복 옷감도 선경직물이 생산한 최고급 양단으로 정해졌다.
최종건의 사업을 향한 집념은 대단했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감부터 살폈다. ‘앙고라’도 그랬고 ‘깔깔이’로 불리는 ‘조제트’도 그렇게 해서 나왔다.
1965년 6월 어느 날 여름철 불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에 단골술집 여자의 옷감에 눈길이 갔다. 시원해 보이던 그 옷감이 일본에서 생산한 ‘조제트’였다.

선경합섬 등 계열사 설립

1966년 1월 최종건은 ‘선경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1966년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건설, 1967년 폴리에스터 원사공장건설, 1968년 제2 직물공장 증설, 1969년 봉제공장 건설, 1970년 선경기술센터 건설 등 원대한 계획이었다.
수원시 정자동 일대의 땅을 매입해 아세테이트 공장 부지를 마련했다. 공장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선경화섬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인재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세테이트 공장은 1968년 12월,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은 1969년 2월에 준공돼 선경직물은 사업을 크게 확장 할 수 있었다.
1967년 2월 최종건은 한국직물원사수출조합 이사장에 선출됐다. 전국 직물업체들이 사용할 원사를 수입해 공급하는 일을 하던 조합이었다. 따라서 아세테이트 공장을 완공하고 나서는 생산업체로서 자리를 맡을 수 없어 이사장직을 내놓았다.
7월에는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선임됐다. 최종건의 둘째 아들 신원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재 경기도 상공회의소 연합회장직을 맡고 있다.
선경화섬은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이 완공되자 곧바로 아세테이트 토우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아세테이트 토우는 담배 필터의 원료로 생산한 전량을 전매청에 납품했다. 수입에 의존하던 아세테이트 토우를 국산화함으로써 150만 달러의 수입대체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폴리에스터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났는데 선경의 생산량은 수요랑의 절반가량에 불과했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선경은 일본 데이진과 합작으로 1969년 7월 선경합섬을 설립했다.

못 이룬 석유사업의 꿈, 그리고 병마

1973년은 선경직물을 창업한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선경그룹이 성년을 맞는 해였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종건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담배를 많이 피웠기 때문인지 폐암판정을 받은 것이다. 최종건은 서울대 병원 주치의 한용철의 소개로 미국 보스턴으로 갔다. 비행기 안에서도 각혈을 할 만큼 이미 병세는 심각했다.
보스턴 병원에서 최종건은 6개월 밖에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다.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고 최종건은 미국에 간지 20일도 못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부터 꿈꾸어왔던 석유사업을 병 치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최종건은 운명하기 1년 전 정유회사 합작을 추진했다.
선경화섬 창립 7주년, 선경합섬 창립 4주년이었던 1972년 7월 1일 최종건은 선경석유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선경과 일본 이토추, 데이진이 공동 투자했다.
선경의 지분은 50%였다. 이듬해 7월, 1일 생산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을 짓기로 하고 일본 데이진은 10억 달러의 자금과 기계, 기술을 제공하며 선경 공장 부지를 마련하기로 약속했다. 또 울산 근처 온산 일대의 땅 100만평에 석유사업단지를 조성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15만 배럴의 원유를 공급받기로 확약을 받았다.

못다 이룬 석유사업의 꿈

그러나 석유사업에 대한 최종건의 야심은 1973년 10월 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 때문에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도 이미 정유사업의 발판은 이때 최종건이 다 다져놓은 셈이다.  석유사업은 최종건의 유작이 되었다.
최종건은 결국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1973년 11월 15일 한참 일 할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석유사업의 꿈은 동생 최종현에게 물려주었다.
고인의 절친한 벗이었던 당시 이병희 무임소 장관은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 선경직물 공장을 세우던 때, 한 달이면 25일을 손수 해머를 들고 일을 하다가 피곤하면 거적때기 위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기계와 씨름을 하던 형이 거대한 산업의 터전인 선경합섬을 만든 것을 남들은 기적이라고까지 말했지, 그러나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형의 사업에 대한 정열과 부단한 노력의 결정이자 형의 웅대한 꿈과 끈질긴 정진의 결산이었을 뿐, 결코 기적은 아니었네….”
<출처 : 수원을 빛내다 명예를 높이다, 수원 명예의 전당 인물사>
발췌 요약 : 김동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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