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명예의전당 인물사- SK그룹 최종건 창업주

 

최종건은 1926년 1월 30일 평동에서 출생해서 1973년 11월 15일 별세했다. 국내 4대 그룹 중 하나인 SK그룹은 최종건이 잿더미 속에서 살려낸 수원 평동의 선경직물에 부리를 두고 있다. 최종건은 지칠 줄 모르는 정력, 단호한 결단력, 강인한 추진력을 겸비한 불세출의 기업가였다.  그는 신의와 성실, 탁월한 리더십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을 재건하여 수출시장 개척에 앞장서는 등 한국 경제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오랫동안 수원과 함께 해온 SK는 수원시민들을 위한 사회적 공헌에서도 다른 기업의 모범이 되고 있다.

 

결단력과 통솔력을 겸비한 불세출의 기업가

선경직물에서 시작해 오늘 날 SK그룹의 초석을 놓은 최종건은 지칠 줄 모르는 정력, 단호한 결단력, 강인한 추진력, 탁월한 통솔력을 겸비한 불세출의 기업가였다.
한국 경제에서 최종건이 남긴 업적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과감한 투자와 신기술도입으로 폐허 상태의 섬유산업을 살려내 국가 주요산업으로 키워낸 공이 가장 크다.
최종건의 성공 비결과 국가 경제에 대한 공헌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공격 경영이다.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을 인수해 최고의 직물공장으로 성장시켰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원사공장까지 설립해 일관 생산체제를 갖추어 한국의 섬유업을 발전시켰다.
둘째, 불굴의 도전 정신이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정과 신념으로 새로운 사업을 과감히 추진했다.
셋째, 품질 우선주의다. 최고의 품질만이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수요가 줄어들고 시장이 정체되면 신제품으로 시장을 이끌었다.
넷째, 애국심이다. 기업을 키움으로써 고용을 늘리고 기업의 성장과 수출 확대를 통해 경제 발전, 국력 증진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18세의 어린나이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수원의 선경직물 견습공으로 들어가 단기간에 생산부장에 오른 최종건은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떠나자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선경직물을 지켰다.
비록 작은 공장이었지만 대리 경영을 하면서도 자기 사업처럼 관리함으로써 훗날 자신의 기업으로 키워나가는 데 필요한 역량을 쌓았다.

성공의 밑천은 품질 제일주의

6·25전쟁으로 섬유산업계도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부산과 대구지역에 있는 방직회사 외에는 전국 대부분의 공장과 시설이 파괴되고 말았다. 전 시설의 70%에 해당하는 방적기 27만 1,000여 추와 직기 5,687대가 사라졌다. 선경직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국의 모든 공장이 폐허가 됐다.
잿더미가 된 공장 터에서 최종건은 직접 기계 부품들을 수습, 직기 4대를 조립해 공장을 재건했다. 최종건이 가진 건 정열과 성실성뿐이었다. 공장에서 숙식을 하며 벽돌을 손수 쌓아 올려 공장을 재건 5년 만에 직기 1,000대를 보유한 큰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정부에서 원사수입용 외환과 기업육성자금을 지원받아 성장의 전기를 마련한 것도 품질제일주의를 앞세워 제조한 ‘닭표 인감’성공의 덕이었다.
최종건은 의복 혁명에 앞장선 인물이다. 당시로써는 첨단 섬유인 나일론을 직접 생산함으로써 소비자들은 저렴한 값에 세탁이 간편한 옷을 사 입을 수 있었다. 외화 절약에도 큰 도움이 됐다. 선경이 나일론을 생산하기 전에는 일본에서 밀수입되는 나일론으 양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대일 통상 중단과 태풍 ‘사라’로 초래된 1959년의 위기는 ‘데도론(폴리에스터)’을 독점 생산함으로써 돌파할 수 있었다. 1960년 4·19혁명의 혼란도 일본 데이진과 협력해 ‘곰보나일론’을 출하함으로써 극복해 냈다.
나일론과 폴리에스터 등의 화학섬유 개발은 국민의 의류생활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경제가 도약하기 시작할 때 대표적인 노동집약적산업인 섬유산업이 경제성장에 미친 영향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1962년부터 1973년까지 섬유산업의 성장률은 19.2%로 국민소득 성장률의 두 배 이상으로 높았다.
선경은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최종건은 섬유 수출에서도 신기원을 열었다. 최종건의 수출에 대한 집념은 정부의 수출드라이브정책에도 부합했다.
경영이 어려웠던 1960년대 초반 손해를 무릅쓰고 홍콩시장을 개척함으로써 활로를 텄다.
최종건은 이렇듯 내수 부진과 경영난을 신제품 개발과 수출로 극복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다.

 

공격 경영으로 기적을 일으키다.
 
선경이 화려하게 비상한 시기는 1960년대 후반이다. 1968년 선경은 아세테이트 공장과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석 달 간격으로 착공했다.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던 업계는 두 공장이 완공되자 기적이 라고 했다. 그 결과 선경은 원사와 제품을 함께 생산하는 수직계열화를 달성했다. 이런 단일화 공정을 통해 다른 업체들과의 생산력, 가격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섬유업계의 최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최종건의 인적 네트워크가 큰 역할을 했다.
합작을 위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업계 사람들을 접촉하고 일본의 파트너들을 감복시켰다.
최종건의 공격경영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설비 투자를 더 늘려나가는 한편 선경합섬 등 계열사들을 새로 설립했다. 1970년 10월에는 폴리에스터 원사를 일본과 호주에  수출해 그해 83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1971년 합성섬유 수출액 총액이 1,000만 달러 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선경의 수출기여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종건이 생애 마지막으로 도전한 석유사업은 중동 전쟁의 발발과 그의 병마로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선경의 사업 다각화를 위한 주춧돌이 되었다. 오늘날 정유, 화학, 반도체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을 이끌고 있는 SK그룹은 최종건이 없었다면 존재하기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원시민을 위한 SK의 통 큰 사회공헌

최종건은 사회환원에도 선구적이었다. ‘장학퀴즈’방송을 후원하며 상금을 전액 지원했다. 유족들은 최종건의 유지를 받들어 ‘선경최종건장학재단’을 설립해 2004년 수원지역 고등학생 20명에에게 장학금을 전달한 것을 시작으로 2017년까지 1,500명 이상의 중고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오랫동안 수원시민과 함께 해온 SK는 수원, 나아가 국가 전체의 경제, 산업발전에 기여했음은 물론 사회적 공헌에도 어느 기업보다 적극적이었다.
SK는 수원에 선경도서관, SK청솔노인복지관, SK아트리움 등 크고 굵직한 도서관과 공연장을 만들어 시민들의 복지향상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SK가 1995년 팔달산 중턱에 건립해 수원시에 기증한 선경도서관은 지상 3층, 지하 1층, 좌석 1,823석 규모다.
2010년 개관한 청솔노인복지관은 일반 어르신 및 저소득 노인의 보지를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또한 2013년에는 장안구 정자동에 대규모 공연관인 SK아트리움이 건립되었다.
이곳에서는 수원시립교향악단과 수원시립합창단이 주재하며 연중 수준높은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사회공헌 활동으로 최종건의 아들인 SKC 최신원 회장은 대기업 회장으로서는 처음으로 2008년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되었고 2009년에는 미국 경제 주간지인 포브스 아시아판이 선정한 기부 영웅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1년에는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2012년에는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초대 대표로 추대되었다.

호연지기와 소년 최종건의 리더십

수원농부의 장남
최종건은 수원 부농인 최학배 옹과 이동대 여사의 4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최두혁은 살림이 그리 넉넉지 않은 수성 최씨 가문의 유생이자 한학자였다.
원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대로 살아온 고향은 화성시 팔탄면이었다. 아버지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이주해 온 곳이 최종건이 출생한 벌말이었다. ‘벌판 가운데 있는 마을’이란 뜻의 벌말은 한자어로 평동이라 썼는데 서호천 물길을 따라 양쪽에 펼쳐진 너른 들판 속에 있는 동네였다.
서호천은 수량이 풍부해 벌말 농부들은 가뭄을 걱정할 일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벌말에는 부농이 많이 생겨났다. 아버지는 벌말에 정착해 나무 장사를 해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대성상회라는 자영업체를 차리고 수원잠업시험장에 왕겨와 볏짚을 납품하여 모은 돈으로 땅을 사들여 60마지기가 넘는 땅을 가진 알짜 부농이 되었다.
위로 누이 둘이 있는 늦둥이로 태어난 최종건을 아버지는 엄하게 키우려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최두혁은 자유롭게 풀어놓고 기르며 浩然之氣(호연지기)를 심어주고자 애썼다.
부자 아버지의 물질과 유학자 할아버지의 정신이라는 배경은 최종건이 큰 인물로 자라는데 좋은 토양이 되었다.
최종건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여섯 살 때부터 동네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과 ‘명심보감’등을 배웠다.
그러다 최종건은 수원 팔달산 아래에 있는 신풍초등학교에 누이 최양분과 뒤늦게 입학했다. 초등학교시절의 최종건은 가난한 소작농 자녀 등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또 조선인 학생들을 괴롭히던 일본 순사의 아들과 싸워 이길 정도로 배짱과 의협심도 강했다.
그 일 때문에 일본인 담임으로부터 유급을 당했지만 그의 심성에 감복한 친구들은 나중에 최종건이 어른이 되어 사업을 시작할 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경성직업학교 진학

최종건이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직업학교에 진학한 것도 계기가 됐을 것이다. 최종건이 선택한 학교는 서울 아현동에 있던 경성직업학교였다. 최종건은 수원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까지 통학했다. 수원역에서 아침 6시 정각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야 등교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내리면 아현동까지 몇 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학교로 갔다.
집에서 수원역까지는 아버지가 사준 자전거로 이동했다. 2년제인 경성직업학교의 2학년에 오른 뒤에는 밤늦도록 실습을 하는 때가 잦아지자 최종건은 서울에 사는 외삼촌댁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의 소개로 들어간 선경직물

학교를 졸업하고 최종건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선경직물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때가 광복직전인 1944년 4월이다. 선경직물은 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회사였다. 일본인이 직물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서호천 근처의 땅 약 4만㎡(1만 2,000여 평)를 사들이는데 중개인 역할을 한 것이다.
원래 선경직물회사는 1930년대에 일본인이 조선에서 만주 일대를 상대로 직물을 수출하던 선만주단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서 설립한 회사였다. 교토직물은 직기를 현물로 출자하고 선만주단은 공장 부지를 사들이고 건물 공사비를 댔다.
 선경직물에 들어가서도 최종건은 일본인의 행패를 묵과하지 않았다.
부당한 언행을 하는 일본인과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최종건은 선경직물에 근무하는 조선인의 중심인물로 부각되었다.
특히 어릴 적 그를 ‘골목대장’으로 여겼던 벌말 출신의 견습공들은 공장에서도 최종건을 잘 따랐다. 최종건의 사업가다운 리더십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입사 1년도 안돼 조장을 맡다.

새로 부임한 일본인 공장장은 최종건에게 종업원 100여명을 거느린 중요직책인 조장 자리를 맡겼다. 입사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을 때였다. 1945년 광복을 맞고 일본인들이 모두 떠난 후 미군정은 선경직물을 敵産(적산)으로 지정했다. 적산은 광복 이전까지 한국에 있던 일제나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인 주주들이 사장 등 임원을 맡았고 최종건은 생산부장에 임명되었다. 최종건의 노력에 힘입어 공장은 1946년 2월에 재가동되었다. 선경직물에서 생산하는 옷감은 품질이 좋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24세가 된 1949년 최종건은 경기도 용인출신인 노순애 여사와 결혼 한 뒤 사표를 내고 직물을 짜는 원사인 인견사 장사를 시작했다. 자기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1년 만에 큰 돈을 벌었지만 곧바로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다음호에 계속>

■ 프로필 PROFILE

1942, 3         수원시 신풍소학교졸업
1944, 3         경성직업학교 기계과 졸업
1944, 4         선경직물 수원공장 공무부 견습기사 입사
1945, 12       선경직물 수원공장 생산부장으로 승진
1953, 10,1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 창립
1955, 5         선경직물 설립,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
1956, 8         수원시 의회 의원(수원시 최다 득표) 당선
1957, 3         ‘봉황새 이불감’ 생산
1962, 4         레이온 태피터 홍콩 수출
1965, 11        깔깔이 생산
1966, 6          선경화섬(주) 설립
197, 7            수원상공회의소 회장 피선
1968, 12        아세테이트 공장 준공
1969, 2          폴리에스터 공장 준공
1969, 7          선경합섬(주) 설립
1970, 5          선경합섬, 수원공장 제1차 증설
1970, 12        선경그룹 회장 취임
1973, 1         선경개발(주) 설립
1973, 5         선경유화(주) 설립, 선경합섬 울산공장 착공,
                      선경합섬 수원공장 제2차 증설
1973, 7         선경석유(주) 설립
1973, 11, 15   별세(향년 47세)

출처: 수원을 빛내다 명예를 높이다, 2018 수원 명예의 전당 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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